▲ 이세일 의학박사(비뇨기과 전문의)
깨진 유리창의 법칙을 기억하자
2000년 뉴욕 쥴리아니 시장과 브래턴 경찰국장이 사소한 범죄들을 통제하기 시작한 후 뉴욕시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그 동안 쓰레기 더미와 무질서 속에 수많은 강력 범죄가 줄을 이었던 이 도시가 조금씩 변화하게 되어 뉴욕은 더 이상 범죄의 온상이 아니게 될 수 있었다.
‘깨진 유리창의 법칙’은 이처럼 사소한 범죄를 방치하면 보다 강력한 범죄도 쉽게 일어나게 되는 것을 설명해주는 법칙으로 처음에는 범죄학에서 사용하던 이론이었으나 이후 경영분야에도 적용되어 고객을 무시하고 방치하는 기업들의 흥망성쇠를 판단하는 중요한 근거이론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우리나라는 그간 일제의 강점과 전후의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산업화와 민주화의 과정을 잘 지내오며 수없이 많은 발전들을 이룩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근래 진정한 양성평등이 아닌 동성애와 성소수자를 보호한다는 미명하에 어릴 적부터 동성애를 오히려 조장시키는 교육을 시도하는 등 성에 대한 관점에서의 지나치게 편향된 집착이 이 사회의 가장 근간이 되는 인륜의 기본질서를 무너뜨리며 우리 사회의 ‘깨진 유리창’으로 작동하려 하고 있다.
어떻게 모두가 가장 귀하게 생각하고 있는 ‘자유’가 진리와 그 본래적 책임성을 떠나서 동성애 편향 사회로 인류를 이끌게 되었을까. 만약 ‘자유’라는 이름으로 성적 행동이 쾌락 추구의 개인적 자유만으로 축소된다면 임신과 생명을 부여하는 인류의 연속성은 더 이상 있을 곳이 없어진다. 인류는 과거와 미래의 연속선상에서 그 설 자리를 얻지 못하고 그 자신만의 개인적 생애의 종말로 끝나버리는 닫힌 한정적 존재가 되고 말 것이다.
성경적 계시에 따르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남자와 여자로 창조되었다. 죽을 육체와 죽지 않는 영을 가지며 그 영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하나님을 알 수 있다.
각 개인은 특별하며 온 우주에 유일무이하게 존재한다. 인간에게는 개인적인 성별에 따라 사랑을 추구하는 일생을 살게 되며 두 남녀는 상대를 자기를 넘어서 상호 초월적 일치를 이룰 특별한 존재로 서로를 인식하고 또 육체적 결합으로 사랑을 나누며 새로운 인간의 공동 창조자가 된다.
인간의 위엄은 이처럼 천부적이고도 거룩한 것이기에 그러한 인간의 성별 본질은 그 어떤 것으로도 손상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손으로 불멸의 영혼과 더불어 우리에게 부여받은 것이다. 어느 누가 어떤 이유로도 그 위엄을 손상시키려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비록 이러한 성경적 믿음을 공유하지 않는 자라도 성적 착취로 인해 인간의 위엄이 비참하게 손상되거나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영육간의 깊은 결합에의 욕구를 충족하지 못하게 되면 그 누구라도 실망, 공허, 비참, 역겨움을 느끼게 된다. 만일 누군가가 계속적으로 육체적 쾌락만을 추구한다면 그러한 육체적 쾌락의 느낌만으로는 숭고한 사랑의 실질적 일치감에의 열망을 충족시키지 못하게 되어버리기에 새로운 성적 관계를 통한 보다 강력한 성적 자극으로 스스로를 계속 몰아가 결국 성중독이나 성범죄를 범하고 말게 되기도 한다.
그가 만약 성적 착취에서부터 스스로를 지키려고 하는 깊은 내면에의 요구가 있는 사람이라면 그 자신만의 이기적인 만족을 위하여 어떻게 다른 이를 착취할 수 있을까? 자신의 내면에서 그 자신이 착취당하도록 허락하는 사람은 자신보다 강력하고 어디서나 나타나는 유혹이나 압력으로부터 그의 개인적 존엄성을 지키려고 어떤 노력들을 해 볼 수 있을까?
너무나 복잡하여져 가는 현대사회에서 다양한 성적 충동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동성애 이데올로기로 인해 한 사회의 도덕적 나침반이 통째로 무너지고 나면 선과 악에 대한 경계선도 함께 무너져버리게 되고 선을 악이라고 하고 악을 선이라고 강변하고 대안이 될 새로운 도덕적 본질도 없어지고 공동선에 대한 의무감도 없어져버려 이 사회는 그야말로 아노미 상태에 빠지게 되고 결국 우리들은 동성애 이데올로기의 전체주의가 세상을 새로이 디자인해 버린 기울어진 운동장 위에 놓이게 된다.
뿌리가 뽑힌 나무는 시들어 죽게 되고 인륜의 정도를 잃어버린 사람은 바른 길을 찾고 싶어도 참된 선과 거짓된 것을 구별하지 못하게 된다. 특히 근래 공영교육방송인 EBS ‘까칠남녀’에서와 같이 동성애 이데올로기가 이 시대를 이끌어가는 가장 새롭고 멋진 선도 이데올로기이기라도 한 것처럼 포장하여서는 안된다. 이제는 일부 파워 엘리트 진보주의자들이 선정적 언론들을 동원하여 사람들은 동성애가 최고의 인권이고 성소수자 권리가 최상의 평등사상이기라도 한 것처럼 오도하는 잘못을 범할 수도 있는 시대가 도래하였다.
일찍이 텔레비전과 인터넷이 보편화되지도 않았던 저 오랜 옛날, 올더스 헉슬리는 그의 명저 ‘놀라운 신세계’에서 정치권력이 디자인 해 놓은 도착화 된 정상과 정상화된 도착을 세분하여 구별하여 낼 수 있을지에 대해 “노예화시키는 기술들이 너무 즐거워서 더 이상 그 누구도 공포를 알아채거나 반대하지도 못하고 정상과 도착을 구별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현명해 질 수 있을지” 깊은 우려와 의문을 제기하였던 것을 잊지 말자.
이세일(비뇨기과 전문의/의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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