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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브란스 정신약리학의 계보를 잇다, 민성길 ┃
작성자
한국성과학연구협회
작성일
2024-07-19 07:52
조회
44
세브란스 정신약리학의 계보를 잇다, 민성길 ┃
원로와의 대화
세브란스 정신약리학의 계보를 잇다, 민성길
의사학과
민성길(閔聖吉)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정신과학교실 명예교수는 1944년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출생했다. 민 명예교수는 유년시절을 마산에서 보낸 후 서울로 이사하여 대광고
등학교를 졸업했다. 1962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하여 1968년 졸업하였고, 1975
년에는 연세대학교에서 의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민성길 명예교수는 의대 졸업 직후인 1968년부터 1973년까지 세브란스병원 정신과에
서 인턴・레지던트 과정을 거쳤으며, 레지던트 4년 차인 1973년에는 전라북도 김제군 백산
면 무의촌에서 6개월 간 근무했다. 이후 신경정신과 전문의 자격을 취득한 민 명예교수는
1973년 군의관으로 입대하여 육군 제59후송병원 신경정신과 과장, 국군광주통합병원 신
경정신과 과장을 역임했다. 제대와 함께 1976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정신과 교수로 임용
되어 2009년까지 봉직했다. 1994년부터 2000년까지는 정신과학교실 주임교수 및 세브
란스병원 정신과 과장을 역임하며 소아정신과, 의학행동과학연구소 및 임상심리학실을 창
설했고, 이후 연세대학교 통일연구원 원장(2000~2002)을 역임하며 탈북자의 정신건강을
연구하는 등 세브란스 정신과의 전문영역을 확장하는 데 기여했다.
민 명예교수가 큰 족적을 남긴 분야는 정신약리학이다. 한국 정신약리학의 개척자 중 한
명인 은사 고(故) 김채원 교수(1948년 연세의대 졸업)의 뒤를 이어 정신약리학 연구에 매진
한 민 명예교수는, 1985년 대한정신약물학회 창립 멤버로서 이후 12년 동안 총무이사를 역
임하며 학회 발전의 초석을 세운 뒤 대한정신약물학회 이사장 및 회장(1997~2002)을 지
냈다. 그 외 학회활동으로는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이사장(1999~2001), 대한사회정신의학
회 회장(2000~2002), 대한임상독성학회 회장(2003~2007)을 역임했다. 주요 저서로는
임상정신약리학(중앙문화사, 초판 1994; 개정판 2003; 3판 2007)이 있으며, 정신의학
분야 교과서인 최신정신의학의 초판(일조각, 1987)부터 7판(2023)까지 대표저자를 맡
았다. 이외에도 화병, 약물남용, 탈북자 남한사회 적응, 세브란스의 첫 정신과 교수 맥라렌
(Charles Inglis McLaren, 1882~1957)에 대한 연구, 독일 작가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 1877~1962)에 대한 연구 등을 진행하며 여러 저술을 남겼다.
민성길 명예교수는 이러한 학술적 공로를 인정받아 연세학술상(1995), 대한정신약물
학회 공로상(2002), 대한신경정신의학회 공로상(2003), 대한민국 녹조근정훈장(2009),
서울시의사회 저술상(2010), 국제신경정신약리학회(CINP) 선구자상(2016) 등을 수상
하였다.
민 명예교수는 정년퇴임 이후 서울특별시 은평병원 원장(2009~2013), 용인 효자병원
원장(2015~2023)을 역임했고, 2024년 현재는 연세카리스 정신건강의학과 및 가족연구
소에서 진료의사이자 연구자로서 임상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최근에는 기독교와 정신의
학의 관계, ‘전통적 기독교 가족윤리 옹호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다.
인터뷰는 2024년 5월 10일 오후 2시부터 4시 30분까지 서울 도곡동 카페에서 진행되
었다. 인터뷰는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의사학과 김영수 교수가 진행하였다. 인터뷰의 첫 문
답을 제외하고는 성명을 표기하지 않았다. 본문의 괄호는 편집자의 부연 설명이며, 정리는
의사학과의 강재구 조교가 담당하였다.세브란스 정신약리학의 계보를 잇다,
2024년 5월 10일, 민성길 명예교수님 모시고 인터뷰 시작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민성길: 네 안녕하세요.
출생 및 가족관계
먼저 가장 기본적인 부분 여쭤보겠습니다. 출생 및 가족 관계에 대해서 말씀 부탁드립니다.
출생은 아버지께서 목회하고 계셨던 경주 인근의 안강(현재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에
서 태어났어요. 해방 후에 아버지께서 여러 지역에서 목회를 하시는 바람에 함양군 안의,
구포, 그리고, 김해에 살다가, 마산으로 왔습니다. 마산 월포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마산중학
교에 다니다가 서울 와서 대광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그리고 그 해 연세대 의예과에 입
학하였습니다. 어쨌든 마산에서 주로 유년 시절을 보냈어요. 저의 어린 시절 추억은 마산에
있습니다.
아버님 집안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시죠.
뭐 기회가 주어지면 아주 자랑스럽게 얘기하는 건데, 경상남도 산청군 생초면 대포리라
는 마을의 민씨 집안입니다. 우리 선조가 민안부(閔安富)라고 그래요. 이분이 고려가 망할
당시 고려왕조의 말하자면 장관격인 판서였대요. 그러다가 이조가 되면서 옛날 고려왕조
때 귀족들을 다 잡아다가 가뒀잖아요. 두문동 70인1)이라는 그런 조직. 이성계가 한 동네에
다 가둬놓고 못 나오게 했어요. 그리고 귀양을 보내는데 우리 할아버지가 경상도로 귀양을
가다가 경상도 생초 땅에 이르렀을 때 여기가 큰 개울이라는 뜻에서 ‘한 개(현재 생초면 대
포리)’라 이름 짓고 따라온 관원들을 돌려보내고 거기서 눌러 살았습니다. 그리고 우리 자
손은 절대로 이조에 벼슬하지 말아라 그랬대요. 그래서 아무도 과거 시험을 안 봤어. 그래
서 몰락한 시골 양반이었죠.
1) 두문동 72현(杜門洞 七⼗⼆賢)을 말한다. 두문동 72현은 고려 멸망 후 조선이 건국되자 조선왕조에
출사하지 않고 두문동에 은거한 고려 유신 72인을 일컫는다.
어쨌거나 그걸 이어받아서 한 500년간 그렇게 살다가 우리가 태어났어요. 아버지는 그
걸 굉장히 자랑스럽게 생각해요. 지조(志操)를 지켰다. 우리 보고도 지조를 지켜라라는 말
씀을 자주 하셨죠. 우리집 가훈이라 할 수 있어요.
아버지는 함양에서 포목장사 하시다가 한 교회 청년에게 전도를 받아 기독교로 개종하
시고 목사가 되기로 하셨습니다. 일본 간사이 성서학교에서 신학공부를 하시고 경주 근처
안강에서 전도사로 처음으로 목회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다가 일제시대 말기 기독교 탄
압이 심해지면서 함양경찰서에 구금되기도 하셨습니다. 그래서 해방 후 같은 장로교회지
만 일제 때 신사참배 반대하던, 신앙의 지조를 지켰던 교파에 합류하셨지요.
고신파라고 들어보셨어요? 아주 펀더멘탈한, 한국 개신교 중에 제일 보수파예요. 그 이유
가 일제강점기 신사 참배를 반대했던 그룹이 예수교 장로회에서 탈퇴해서 조직한 교단이기
때문입니다. 그 효시가 주기철 목사님(朱基徹, 1897~1944)인데 마산, 창원 사람이에요. 주
기철 목사는 순교했죠. 6.25때 순교하셨던 애양원(愛養院)의 손양원 목사님(孫良源,
1902~1950)도 마산 근처 함안 출신입니다. 부산지역의 한상동 목사님을 위시한 소위 옥중
성도들이 해방 후 평양 감옥에서 살아나와 모여서 만든 교단이 장로교회 안에서 고신파라
고 그래요. 고려신학교파예요. 부산에 고신대학교와 복음병원이 있죠. 한국 기독교사에 서
유명한 얘기입니다. 한국교회 분열의 시작이라는 말도 있어요. 일제시대의 후유증이에요.
그리고 일제 때 신사참배를 반대했던 선교사 집단이 경상도 지방에서 선교하던 호주 선
교부였어요. 당시 세브란스 연합의학교에 호주선교사 정신과의사 맥라렌교수가 파견되어
있었는데, 그가 신사참배 반대에 가장 앞장섰다 합니다.
어머님은 어떤 분이셨나요?
어머니는 뭐 우리가 지금 보기에 굉장히 똑똑한 여성인데 여자라서 시집 가서 그냥 평생
남편 뒷바라지하고 자식들 키웠지요. 지금 돌이켜 보면 굉장히 현명한 분이셨어요. 자식들
키우는 거 보면 알죠. 하여튼 나는 의사가 되고 동생은 서울공대 건축과를 나왔어요. 공부
를 열심히 했죠. 내가 의예과 때 성백선 교수가 담당한 심리학 시간이었는데, 의예과 학생
전원이 다 아이큐 테스트를 했더랬어요. 제 아이큐가 별로여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웃음).
근데 지금 생각하면 어머니가 우리를 어떻게 구워 삶았는지 열심히 공부했지요, 참 고맙게
생각해요. 세브란스 정신약리학의 계보를 잇다,
어머니는 아주 현모양처셨고 대단하신 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어머니께서는 결혼 전부
터 어른들 몰래 예배당에 다니셨대요. 만약 공부를 제대로 했으면 뭐 여성 지도자가 됐을
분인데 국민학교만 나왔어요. 공부하고 싶다고 울고불고 그렇게 난리를 쳤는데, 친정 아버
지가 여자가 무슨 공부하느냐고 하셨답니다. 결국 중매로 얼굴도 모르는 남편하고 결혼했
어요. 집안 좋다고 (웃음).
그리고 제 동생은 민현식이라고 그러는데 아주 유명한, 나보다 더 유명한 건축가예요. 한
예종에서 교수하다가 지금 은퇴하고 설계사무소 하고 있는데, 김수근(⾦壽根, 1931~1986)
이라는 건축가의 직계 제자 중에 하나예요. 누이동생은 민성희라고 하는데, 결혼해서 그냥
주부로 살았는데 결혼하기 전에 소셜워커로 일했어요. 그때는 잘 몰랐는데 매춘하던 여성
들 갱생 사업을 했습니다. 좋은 일 많이 했죠.
지금 가족 관계는 어떻게 되시나요?
집사람하고 아들 둘, 며느리 둘이 있고 손자가 둘, 손녀가 하나. 집사람은 문경덕. 연세대
음대 출신인데, 교회 성가대에서 만나 알게 되었고 결혼하였습니다. 큰 아들은 연세대 전자
공학과를 나와 삼성전자에 다녔습니다. 큰 며느리는 연세대 국문과를 나와 교사를 하고 있172 ┃ 연세의사학 제27권 제1호
는데, 딸과 아들을 두고 있습니다. 둘째는 연세대 전산과를 나와 인텔에서 근무하고 있고,
며느리는 이대 도서관학과를 나왔고 지금 주부입니다. 아들 하나를 두고 있지요.
기독교와의 만남
유년 시절 성장 과정에 대해서 좀 여쭤보고 싶습니다. 선생님께서 독실한 크리스찬이시라고 들
었는데요, 기독교와의 만남에 관한 부분, 그러니까 기독교의 영향을 언제부터 받으셨는지 궁금
합니다.
저는 아버님이 목사님이시니까 뭐 모태 신앙이죠. 근데 아버지가 목사님이시긴 했지만,
완전히 요즘 말로 구닥다리 유교 집안, 양반이라고 자칭하는 집안의 후손이거든요. 그래서
기독교를 믿지만 유교적으로 엄하셨어요. 돌이켜보면 참 자상하신 분이었는데 우리는 좀
엄격하다고 봤죠.
어릴 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제 일상생활은 거의 교회와 학교, 병원뿐이었습니다.
어머님께서도 항상 말씀하시기를 “너는 목사 아들이니 잘해야 한다”고 강조하셨어요. 의예
과 때도 채플에 충실하게 참석했고, 본과 가서도 매일 아침 학교채플에 참석했어요. 교수로
있는 동안에는 교수로서의 커리어를 쌓는데 올인했지만, 최소한 주일만은 교회에서 시간
을 보냈어요. 1968년 이후 55년간 아버지가 개척하셨던 한 교회에 다니고 있는데, 젊어서
는 성가대, 주일학교 교사 등을 했고, 나중에 장로로 피택되었습니다.
의학에의 관심
의학을 전공하시기로 마음을 먹으신 계기가 있으신지요?
내가 대학 입학할 당시는 5.16혁명 다음 해 였는데, 공대가 굉장히 인기가 좋아서 커트라
인이 의대보다 높았어요. 의사가 되는 거는 부모님들의 소원이였죠. 왜냐하면 옛날에 다 가
난할 때 잘 사는 사람은 다 의사였으니까. 하여튼 아버지는 나보고 당신에 이어 목사 하라
고 하셨지만, 우리 어머니가 의사 하라고 그러셨지요.세브란스 정신약리학의 계보를 잇다,
의대에 진학하실 때 영향을 끼친 의사가 있으셨는지요? 그리고 그때 의사에 대한 어떤 이미지
를 가지고 계셨는지요?
국민학교 시절에 아버지께서 부산 복음병원에 나를 데리고 가서 장기려 박사님께 인사
를 시키신 적이 있어요. 그때 의사란 훌륭한 사람이구나라는 강한 인상을 받았죠. 이후에
그분을 직접 만난 적은 없었지만, 그의 삶을 추적하면서 존경하는 마음은 늘 있었어요. 그
리고 의사에 대한 이미지는 당시 유명하셨던 알버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1875~1965). 신앙으로 아프리카에서 의료선교사로 일하셨고 노벨상도 타셨죠. 그분을
보면서 의사는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도 했고요. 당시 슈바이처는 한국
청소년들 사이에 위인이었죠. 의대생 때 그분을 기리는 생명경외클럽(Veneratio Vitae
Club)이라는 동아리 활동을 하였습니다.
어릴 때 일은 굉장히 깊은 영향을 끼치는데, 대개 기억이 없어요. 당시는 하찮은 걸로 생
각하지만 사실 그때 받은 영향이 커요. 사람들이 그걸 잘 어프리시트(appreciate)를 못해.
나도 지금 와서 돌이켜 보니까 어릴 때 유년주일학교에 다니고, 교회 중고등부 학생회장하
고 주일학교 선생도 하고 그랬거든요. 애들 앉혀놓고 성경 얘기나 동화도 해주고. 성경 이
야기야말로 빅 히스토리 아니겠어요? 이게 내 커리어에 엄청나게 도움이 됐어요. 내가 대
중 앞에 나가서 무슨 말을 할 때 별로 두려움이 없어요. 그게 주일학교 때부터 무대에 서고,
교회 모임에서 발언하던 그런 경험이 있으니까.
세브란스 선택 계기와 학창시절
지금까지의 말씀을 들어보면 세브란스를 선택하신 계기에 아무래도 기독교의 영향이 분명히
있을 것 같은데요.
아버지가 ‘기독교 대학 가라, 그러셨죠. 근데 이건 당시 대학입시 제도와 관련있어요. 이
전에는 대학별로 입학시험을 치렀는데, 5.16혁명으로 갑자기 대입 자격 국가고시라는게
전국적으로 실시됐어요. 굉장히 놀라고 당황했죠. 제1회 국가시험, 1962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우리가 그 첫 대상이었고요. 그런데 갑자기 체능을 시험성적에 반영하는 거예요. 필
기고사 300점 만점에 체능 50점 만점, 합계 350점 만점으로요. 그래서 체능이 결정적으로
중요해졌지요.
일단 국가고사 필기 시험 성적이 발표된 후에 그 점수로 대학에 입학지원을 하는데, 지원
후에 다시 각 대학에서 대학 책임하에 추가로 체력시험을 봤어요. 면접시험도 있었는데 점
수에 반영된 것 같지는 않았고.
체력 시험점수는 전국적으로 같은 기준을 따랐는데, 100m 달리기, 턱걸이, 멀리뛰기, 야
구공 던지기, 또 하나 팔굽혀 펴기던가? 각기 10점 만점이었죠. 집에서 스스로 시험해 보면
점수를 알 수 있죠. 시험을 치른 후에 급하게 열심히 연습하긴 했는데, 갑자기 체력을 올리
긴 어렵잖아요? 체력시험에 자신이 있으면 필기 시험 성적이 좀 낮아도 일류대학에 지원했
고, 시험 성적이 좀 높아도 체력에 자신이 없으면 급이 낮은 대학에 지원하고 그랬죠.
근데 아버지가 ‘기독교 대학 가라, 그게 좋다’ 그래서 연세대학을 갔는데 지금 굉장히 좋
아요, 후회 안 하고. 잘됐다 싶어.
선생님이 입학하신 게 1962년도니까 신촌으로 이전한 다음에 들어오신 거죠? 그러면은 그때
새 캠퍼스잖아요. 새 캠퍼스에서 생활이 어떠셨는지요.
서울역 앞 옛 교정에 대해서는 우리는 몰라요. 선배들에게 구 교정에 대한 이야기들을 듣
긴 했어요.
우리는 처음 의예과 2년은 본교에서 했죠. 의예과는 이공대에 속해 있어 가지고 거기서
캠퍼스 생활했어요. 거기 분위기는 뭐 아름답고 참 아주 좋았습니다. 당시 고등학교 국어교
과서에 신록예찬이라는 수필이 실려 있었는데, 그 신록이 연세 숲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죠.
그런데 우리는 토요일도 오후까지 수업했어. 그러니까 모두 지겨워했죠. 뭐 쓸데없이, 국
어, 독일어, 라틴어, 유기화학, 식물학, 개구리 해부까지 별걸 다 배웠어요. 근데 그 개구리
를 우리가 직접 잡아 와야 했어요. (웃음).
그때 의예과 학생들은 본과 가서 공부하면 되지, 의예과 공부할 필요 없다는게 일반적인
분위기라서 실컷 놀자는 학생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소위 “땡땡이”를 자주 쳤지. 그때 나는
아버지께서 그 어려운 개척 교회 하시면서 어렵게 등록금 만들어서 주신 건데, 내가 왜 땡
땡이 치느냐 난 죽어라 수업 듣고 공부할 거야. (웃음). 그때 완전히 내가 이상한 놈으로 치
부돼서 따돌림받고 그랬어요. 세브란스 정신약리학의 계보를 잇다,
매년 의예과에서 본과 올라갈 때 몇 명 정도 낙제했어요. 학생들은 불만이 많았지요. 그
것 때문에 의과대학에서는 의예과를 우리가 가져와야겠다, 그래서 본교하고 긴 논쟁을 했
죠. 생각하면 의예과의 수업을 맡아야 교수님들이 자리가 있으니까 본교에서 의예과를 절
대 안 놓으려고 그랬어요. 그래서 원주 의과대학을 세울 때 아예 처음부터 통합으로 6년제
하면서 의예과를 없애버렸죠.
학창시절에 기억나는 활동들이 있으신가요?
내가 어릴 때 가지고 놀던 것 중에 교회당 풍금이 있었어요. 또 중학교 때부터 성가대를
했어요. 그래서 내가 음악에다가 합창을 좋아해. 그래 가지고 교회에서는 물론 고등학교 때
도 합창반하고, 의예과 때는 기독학생회(Students Christian Association, SCA) 합창반
하고, 학교 밖에서도 아가페합창단하고, 본과 들어와서는 이브닝콰이어(eveningchoir)를
했어요. 이브닝콰이어는 의대생하고 간호대학생이 성가대를 만들어 토요일마다 병동을 돌
면서 찬송가를 부르거든요. 이브닝콰이어. 이름도 근사하죠? 이브닝콰이어는 매년 세브란
스 음악회 때 중심적 역할을 했습니다. 지금도 해요. 한때 제가 지도교수를 했죠. 우리 클라
스메이트끼리도 중창단을 만들어 연세대 축제나 세브란스 음악회에 출연하기도 했습니다.
또 SCA 활동도 했어요. 요즘의 SCA와 달리 당시 의대 기독학생회는 전통적 신앙활동을
했고, 그리고 여름방학 때 무의촌 진료를 했어요. 동기 김성규(1968년 연세의대 졸업) 전
세브란스원장이 이브닝콰이어와 SCA 회장이었어요.
교외활동으로는 생명경외클럽. 그거는 서울대, 연대, 고려대, 이대 의대생들하고 약대생
들, 간호대학생들, 서울대 수의과 학생들이 모여 교제하고 농촌 봉사, 무의촌 봉사하는 학
생 클럽이에요. 슈바이처를 본받아서 생명을 경외한다 하는 그런. 세브란스 출신 선배 중에
김일순(1961년 연세의대 졸업) 선생님 알죠? 황의호(1962년 연세의대 졸업), 또 고윤웅
(1964년 연세의대 졸업), 조범구 선생님(1964년 연세의대 졸업) 등등 훌륭한 선생님들이
그 클럽 선배들입니다.
방학 때마다 무의촌 진료를 한 게 추억이에요. 저는 여름방학에는 의대 기독학생회
(SCA), 겨울방학에는 생명경외클럽에서 무의촌 진료를 했죠
학생활동 중에 ‘분극의 밤’이라는 게 있던데요. 어떤 건가요?
의대생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단막극 축제예요. 한 학년이 하나씩 단막극을 준비해서
의대 강당에서 공연하였습니다. 분극의 밤 시즌이 온다고 하면 누가 나서서 준비하자 그래
요. 그러면 ‘내가 참여할게’ 해서 자기들이 어떤 연극을 할지 정하고 연출, 음악, 조명 다 맡
아서 하고. 어떤 학년은 또 전문가 데려다 코치도 받고 아주 열심히 했어요. 한 학년의 연극
이 끝나고 다음 학년이 준비하는 동안 막간이 잠깐 한 10-15분 있는데, 그 시간을 지루하지
않게 한다고 학생들이 나와서 대개 음악 쇼를 했어요. 나는 막간 쇼 팀으로 참여했습니다.
분극의 밤이 다른 대학 여학생들한테 인기 좋았어요. 그때 우리는 여자친구를 초대하는
거야. 자랑삼아 학교도 구경시키고 데이트하고 그랬지.
선생님께서 의대에 재학하시던 시기는 한창 학생운동이 활발하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의대에
서도 학생운동이 활발했는지, 선생님께서도 참여하셨는지 궁금합니다.세브란스 정신약리학의 계보를 잇다,
1964년 6월 한일협상 반대운동 시위가 크게 일어났어요. 연세대 전 학생들과 나를 포함
해서 의대생들도 다 같이 가두시위를 나갔죠. 아현동에서 경찰에 쫓겨서 돌아왔어요. 그러
고는 2~3일 정도로 기억하는데 의대생들이 병리학 실험실에서 단식 농성을 했어요. 외래
앞마당에서 무슨 화형식을 하고 종료했던 게 기억납니다. 당시 이 사태로 연세대는 고려대
와 같이 정부 당국으로 무기한 휴교 명령을 받았어요.
정신과 지원 이유
의대 6년 마치시고 인턴 레지던트 생활을 하셨을 텐데, 졸업하시던 1968년 즈음이 워낙에 의
사 시험 치고 외국으로 많이 나가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시기에 두뇌 유출이라는 사회
적 문제가 발생했을 때인데, 그런 문제들과 함께 당시 수련의들에 대한 대우도 그렇게 좋지 않
았었다고 들어서 선생님께서 인턴・레지던트 하시던 시기에 대한 얘기를 여쭙고 싶습니다. 먼
저 졸업하시고 나서 정신과를 택하셨는데, 정신과를 택하게 되신 이유가 무엇인지가 궁금하고
요. 그리고 그때 정신과에서는 어떤 식으로 수련을 받으셨는지요?
내가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장차 목사가 되는 게 어떠냐고 했던 그게 일종의 죄의식으로
남아 있었죠. 좋은 의사가 되겠다고 마음먹었어요. 그래서 착실하게 공부했죠. 그런 마음이
있어서 본과 와서 강의를 듣는데, 정신과 수업 때 김채원 선생님께서 프로이드(Sigmund
Freud, 1856~1939)와 정신분석을 강의하셨는데 너무 재밌는 거야. 직감적으로 정신과
의사가 목사 비슷한 직업이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수업 끝나자마자 교수실로 올라가서 ‘선
생님 저 앞으로 정신과 하겠습니다’ 그랬더니, 김채원 선생님 아주 무서운 분이에요, 낙제
를 막 시키는 분입니다. 이분이 ‘인턴하고 그래도 정신과가 하고 싶으면 그때 다시 와’ 그러
시더라고. 내가 좀 섭섭했지. 근데 당시 치프 레지던트(chief resident)로 신용건 선생
(1965년 연세의대 졸업)이라는 선배가 있었는데, ‘너 정신과 할 생각이 있냐’ 하면서, 수시
로 나오라 해서 술 사주고 그랬어요. 아마도 김채원 선생님께서 시키신 것 같은데, 나한테
잘해주더라고요. 그래서 일찌감치 정신과 하는 걸로 정해졌지요.
근데 4학년 되니까 자꾸 다른 생각이 들더라고요. 외과는 취미가 없고, 내과 할까 하다
보니까 너무 공부 잘하는 애들이 그리 간다고 그러고. 나는 애들을 좋아했으니까 소아과 할
까 하다가, 소아과도 또 뭐 경쟁이 있었어요. 그런데 정신과는 아무도 안 하려고 그러지. 그
당시 정신과는요, 그거 한다 하면 너 미쳤냐 왜 그런 걸 왜 하냐 그랬어요. 우리 아버지도
어머니도 왜 하필 그 많은 과 중에 하필 왜 정신과 한다고 그러냐, 외과해서 돈 벌어야지.
돈 벌어서 당신 개척교회 짓는데 연보(捐補)해라 이거였죠.
당시 정신과 의사라하면 대개 그 이미지가 술 퍼마시고 인생이란 뭐냐 뭐 그런 거 토론하
는 괴짜였어요. 우리 선배들 중에도 하도 술 마셔서 김채원 선생님이 쫓아낸 분도 있어요.
당시에 정신과 규모가 크지 않았던 거네요. 저의 짐작이기는 합니다만, 정신과에서 인턴・레지
던트 하셨을 때는 환자도 다른 과에 비해서는 많지는 않았을 것 같기는 한데요.
아뇨. 그 당시에는 서울 시내 정신과 개업하는 사람 몇 명, 그리고 대학병원에 정신과 있
는 데는 서울대 연대 고대 정도고, 이화여대도 있었는데 입원실은 없었어요. 그 4개밖에 없
었어. 당시 가난한 사람들은 대개 청량리 뇌병원에 가고, 저 돈 좀 있고 하면 대학병원에 오
니까 항상 환자는 넘쳐났어요. 그래서 모든 대학의 정신과 입원실 스페이스(space)는 넓었
어요. 세브란스가 처음 신촌에 병원 세울 때, 미국 미 8군에서 지어줬다는 그 병동 6층의
전면 반쪽을 다 정신과가 썼거든요. ‘62병동’이라 해요. 병원의 전체 병상이 약 400베드
(bed) 조금 넘었는데 그게 33베드였어요. 서울 시내 유명한 집안 사람들 중에 이상한 사람
들 다 여기 입원해 있었어요. 이름 대면 알 만한 분들.
인턴・레지던트 시절
세브란스가 1914년에 인턴 제도를 가장 먼저 도입했다고 그러더라구요.
역사는 잘 모르겠어요. 우리 학교 공부할 때만 해도 산부인과, 외과, 마취과 이런 데는 외
국인 선교사가 있었고, 그런 분들은 미국에 정통하니까 아마 인턴 제도가 있다고 한다면 세
브란스에서 가장 먼저 했을 가능성이 많아요. 제가 오기 전에도 하고 있었죠.세브란스 정신약리학의 계보를 잇다,
졸업하고 바로 인턴과정에 들어가셨습니다. 당시 많은 분들이 미국에 갔던 것으로 아는데요.
네 그때는 의대 졸업하자마자 모두들 미국 가는 붐이 일었습니다. 미국에 의사가 모자란
다고 해서 소위 ECFMG(Education Commission for Foreign Medical Graduates)라
는 자격시험을 쳤는데, 대부분의 의대생은 다 합격했어요. 그때 우리 학년도 70명 졸업했
는데 50명이 미국 갔어요. 다른 의대들도 마찬가지였어. 그때 사회에서는 ‘아니 실컷 공부
해서 왜 미국 가서 일하냐, 우리가 키웠는데’ 그게 두뇌유출이다 그래서 신문에 많이 나고
해서 우리가 그러면 안 되지 하는 생각도 했어요. 우리 어머니도 전쟁 날지 모르니 너라도
미국가라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안가기로 마음 먹었죠. ‘전쟁나면 군대가지 뭐’ 하고 생각
했습니다. 지금은 잘했다고 생각해요.
미국으로 많이 가셨으니, 역으로 인턴이나 레지던트를 할 수 있는 인원 자체가, 모수 자체가 줄
어드는 것은 아니었나요?
그때 세브란스도 조그마했기 때문에 인턴이나 레지던트 수급이 크게 모자라지 않았어요.
그리고 연세대만 하더라도 본교 한 20명 남았고, 미국 가기 전에 인턴 하고 간 사람도 있으
니까. 그래서 자리가 꽉 찼어요. 그중에 과에 따라 타교 출신들이 한두 명 있긴 했지만 거의
다 세브란스로 다 채웠어요.
당시에 아무래도 수련직 대우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인턴 레지던트 하시면서 좀 힘드신 점들도
있었을 거 같은데요.
그때 우리는요, 월급 적은 거는 너무나 당연한 거였어요. 기대를 안 했어요. 월급 적다는
거 알고 들어갔고, 각오하고 들어갔고. 그래서 월급 적은 거 가지고 그리 큰 불만을 가지지
는 않았어요. 그렇지만 가끔씩은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고 그래가지고 데모는 했죠. 인턴
때 데모를 했는데, 그건 맨날 하는 거야. 매년 이때쯤이다 싶으면 이제 월급이 너무 적다,
음식이 형편없다 그래가지고 12시 야간 야식 먹을 때 내려가서 식판을 뒤엎어요. 그렇게
퍼포먼스 하고 일제히 인턴숙소를 나와 어디 여관을 하나 정해서 거기서 모여 있으면 병원
직원이 와서 ‘아이, 선생님들 왜 그러세요, 난리 났어요.’ 그러면 ‘아 시끄러!’ 하고 쫓아내
고. 그리고 드디어 보수를 얼마 올려줄게 하고 연락이 오면 슬그머니 들어오고. 우리 때도
한 사흘 나가 있었다가 들어왔거든요.
레지던트 할 때는 뭐 자기 과에 충성하느라고, 그리고 무엇보다 교수님한테 잘 보여야 해
서 별소리 안 했습니다. 근데 그 논문2)을 보면 1971년도에 큰 사건이 있던 것 같은데, 가
만히 보니까 주로 서울대 중심으로 썼지, 세브란스에 대해 저는 별 기억이 없어요. 논문을
읽어보니까 ‘그때 그런 일이 있었나’ 하는 정도의 기억이죠.
그럼 대학마다 인턴・레지던트들의 대우나 파업같은 상황들이 전부 달랐던 건가요?
좀 달랐고, 우리는 월급이 좀 나온 셈이었다고 봅니다. 그 당시에 우리는 인턴 때 한 6천
원 정도는 받았거든요. 근데 내 친구 중에 서울대 친구가 하나 있는데 걔들한테 나중에 들
은 얘기인데 자기들은 월급이 별로였답니다. 그 시대에 서울대학교 교수들 월급이 일정하
지 않아서 월급이 적은 사람은 이중개업을 했어요. 그런데 세브란스는 이중개업 못하게 했
거든요. 서울대학은 국립이라 사립과는 달랐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그렇게 난
리 친 것 같아요. 우리는 세브란스라는 자부심도 있고.
수련의 시절 기억나는 다른 에피소드가 있으신가요?
사실 내 커리어 중에 가장 중요한 분이, 이동식 선생님이라는 분이 있어요. 김채원 선생
님과 더불어 저의 스승이십니다. 그분을 꼭 언급해 주면 좋겠어요. 우리 레지던트때 세브란
스에 오셔서 사이코테라피, 즉 정신치료를 트레이닝 시켜준 분이에요. 불교를 신봉하는 무
신론자이신데, 맨날 오면 뭐 정신분석하고 불교의 수도하는 거 이걸 비교하면서. 정신치료
를 가르쳤거든요. 이동식 선생님이 그 당시에 미국에서 돌아와서 한국의 유명한 스님들, 경
봉스님(鏡峰. 1892~1982)이라든가 유명한 스님들하고 대화가 된다고 우리한테 말씀하고
그랬지. 저는 당시 정신분석치료와 기독교와의 관련에 대해 생각을 많이 했어요.
2) 인터뷰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사전에 다음의 논문을 공유하였다. 정준호, 「1971년 수련의 파업:
1960~1970년대 의료 인력에 대한 국가 통제 강화와 의사 사회의 반발」,
김채원 선생님은 정신약물학과 생물정신의학을 전공하시기 때문에 아마도 균형을 맞추
기 위해 정신치료하시는 이동식 선생님을 우리 학교 외래교수로 초빙하셨던 것 같아요. 그
선생님이 나한테 아주 엄청나게 영향을 미쳤죠. 내가 화병 연구한 것도 그 양반 때문이야.
왜냐하면 이 선생님은 맨날 한국 것이 세계적이라고 말씀하셨거든요. 그럼 나는 정신과 의
사로서 한국적인 게 뭐가 있을지에 대해 질문을 가졌어요.
그래서 화병을 생각했습니다. 크레펠린(Emil Kraepelin, l856~l926) 식으로 열심히 한
거예요. 화병의 개념, 역학, 원인, 증상, 치료, 예후까지 차례차례로 해서 완성했죠. 개인적으
로 굉장히 자부심을 가지는데, 일반 사람들은 엄청 관심을 가져주었지만, 이동식 선생님은
막 나보고 야단치는 거예요. 화병은 그냥 흔히 하는 소린데 그게 무슨 질병이냐고, 니가 서양
에 사로잡혔다고. 미국 사람들이 병명 만들고 진단 기준 만들고 뭐 이렇게 체계화하는 걸 좋
아하거든요. 그래서 ‘선생님 가르침 때문에 했는데요’ 했더니 ‘시끄러워!’ 라고 하셨습니다.
결국 정신약리학을 전공하면서 이동식 선생님 문하를 떠났지. 그렇지만 내가 명절 때는 꼭
찾아뵙고 그랬지. 명절 때 이 선생님은 문하생들을 불러 파티를 하는데, 그 당시 모이기만 하
면 노래를 불렀어요, 나보고는 꼭 찬송가를 부르라고 했어요. 재미있는 분 아니겠어요?
무의촌 파견
무의촌에서도 진료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레지던트 4년차가 되기 직전에 정부에서 명령이 내려왔어요. 레지던트 4년차들한테 무
의촌 근무 6개월 하지 않으면 전문의 자격시험 칠 자격을 안 주겠다 그랬어요. 우리 같은
사람은 그때 군사 정부라서 반항할 생각을 전혀 못했어. 어쩔 수 없이 가야지 뭐, 그거 한 6
개월 견디면 되겠지 뭐, 이렇게 생각해서 부랴부랴 갔지. 나라에서 연세대 레지던트는 전라
북도로 가라, 또 어느 대학 레지던트는 어디로 가라 등등 지정이 내려왔어요.
그래서 우리가 전라북도 도청에 가니까 거기 보건 담당관이 각기 부임할 면 소재 진료소
를 가르쳐 주었어요. 그럼 그때부터 짐 싸들고 가는 거예요. 나는 김제군 백산면 보건지소
에 갔습니다. 보건지소는 요만한 건물 방 두 개 있는 거, 사무실이 있고, 책상이 있고 그게
보건지소예요. 직원으로 두 사람의 간호조무사가 있었습니다. 외래환자도 있었지만, 왕진
요청이 오면 가방 들고 시골길을 걸어서 갔지요. 일반의로 근무해서 무의촌에서는 정신과
환자에 대한 경험은 없었어요.
나하고 집사람하고 애기, 그때 아들 낳아가지고 9개월 됐는데, 문간방 하나를 월세로 얻어
살림을 차렸죠. 고생 엄청 했지만 그런대로 시골생활은 추억거리입니다. 당시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었는데, 사실 그때 통일벼라던가 농촌 사람들의 열기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군의관 시절
레지던트 이후의 생활로 다시 돌아와보도록 하겠습니다. 저희가 궁금했던 게 군의관 시절에 대
한 이야기인데요. 육군 제59후송병원하고 국군 광주통합병원에서 과장을 역임을 하셨습니다.
육군 제59후송병원의 신경정신과 과장을 하시게 하셨을 때가 궁금한데요, 보통 군의관을 몇
년 하나요?
우리 군의관들은 군사 훈련받는 기간을 포함해서 복무기간이 3년 3개월이죠. 저는 육군
제59후송병원에서 2년, 국군 광주통합병원에서 1년 근무했습니다. 우리 군의관은 그해 의
대 졸업생이 후임 군의관이 되어 배치되어 올 때까지 제대하지 못해요. 일반 사병보다 군의세브란스
관들은 거의 2배 오래 근무해요.
육군 제59후송병원에서 어떤 업무를 보통 맡아서 하셨는지, 그리고 어떤 정신질환 문제들에
대응을 하셨는지요?
후송병원도 병원이에요. 군인이나 민간인이나 정신장애 진료는 꼭 같습니다. 단지 정신
과 군의관으로서 군대 생활 부적응자 골라내는 게 특별한 임무였어요. 평소에도 의병제대
심사를 하지만, 일 년에 한 차례 특별한 행사가 있었어요. 일선 부대에서 하는 행동이 이상
하면 뽑아서 후송병원에 보내요. 대거 입원하는데. 그러면 선별해서 제대, 복귀, 제대, 복귀
등을 건의하였습니다. 그런데 꾀병 환자들이 있으니까 그걸 감별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그게 흥미 있는 일이었습니다.
여자 내의 수집광, 야뇨증 환자도 있고. 야뇨증 환자는 자대에서 하도 오줌 싸대니까, 기
합이 대단하거든요. 그러니까 실컷 기합을 받아도 계속 오줌 싸면 진짜거든. 그러니까 할
수 없이 제대감이라고 미리 알아서 보내는 거예요. 그럼 제대 시켜야지 원대 복귀시키면 그
쪽에서 난리 나요. 왜 보냈냐고. 그 당시 군대 생활 생각하면 재미있는 일이 많죠.
그러면 국군 광주통합병원으로 이동하시게 된 거는 규정에 따라서 이동하신 거예요?
제59후송병원은 전방이거든요. 근데 전방에서 있으면 그다음 후반기는 대개 제대할 때
까지 후방으로 보내죠. 후방에는 서울 국군수도통합병원. 부산 수도통합병원, 대구통합병
원, 광주통합병원 이렇게 몇 군데가 있는데 서울 출신 군의관들은 모두 서울 수도통합병원
에 가기를 원했죠. 그곳은 끝발이 되게 세요.. (웃음). 나는 광주로 밀렸지.
전남대 출신들은 대개 광주로 가거든요. 자기 고향이니까. 그때 하필 당시 정신과 군의관
중에 광주 출신이 없었던 거예요. 그래서 내가 갔는데 환대를 받았죠. ‘웬일이냐 니가 여기
왜 왔냐’ 이거지. 왜 지방 대학생이 서울 가서 공부하다가 고향에 내려가면 동네 사람들이
‘야 너 서울 가서 공부 잘하냐 우리 집 와서 밥 한번 먹어라’ 뭐 이런 분위기인데, 타지방 사
람이 광주에 왔다고 전남의대 출신 정신과 선생님들이 ‘얼마나 힘드냐, 고생이 많다’ 그래
가지고 거의 매일 저녁 밥 사주시는 거야.
저는 이 당시에 영호남 갈등이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때 저는 그런거 못 느꼈어요. 다 자기 하기 나름이죠. 나는 뭐 경상도 말 그대로 쓰고 다
녀도 아무런 지장도 없었고, 거기 있는 정신과 선생님들이 잘 대해 주시고, 전남의대 정신
과 세미나에도 참석하고, 전남의대 정신과 레지던트들도 통합병원 세미나에도 오고. 그리
고 전라도에 구경거리가 많습니다. 창하고, 거문고 켜고 이런 거 있잖아요. 내가 한번 광주
온 김에 남도 문화 그거 구경하고 싶다 그랬더니, 동료 군의관이 그런 거 전문으로 하는 아
주 유명한 요정 같은 데 데려갔더랬어요. 너무나 좋았고 고맙지. 한 선배님 주선으로 의재
(毅齋) 허백련(許百鍊, 1891~1977) 화실에도 갔었어요, 밥도 얻어 먹고 그림도 하나
얻어오고. 세브란스 정신약리학의 계보를 잇다,
세브란스 정신과와 정신약리학
군의관 하시고 나서 다시 학교로 돌아오셨는데, 세브란스 정신과로 돌아오시고 나서 어떤 활동
을 하셨는지 말씀해주시죠.
학교로 돌아왔다고 하니까 간단해 보이지만, 나는 그때 제대하면 어떡하나 걱정도 많이
했습니다. 그래도 금방 임용이 되어서 오자마자 외래하고, 연구 계획하고, 의대 수업했죠.
당시 정신과에서 저처럼 제대로 코스 밟은 사람이 많지는 않았거든요.
우리 세대 때는 다른 대학도 대개 그랬는데, 의과대학 졸업하고 인턴하고 바로 레지던트
해서 제대로 코스를 밟아서 6년 만에 전문의 자격 따는 그런 상황이 비교적 잘 정착된 초창
기 그룹이에요. 그 이전에는 말하자면 좀 혼란스러웠습니다. 인턴 레지던트 제도가 도입이
됐다고 하지만 각 과별로 대학마다 양상이 다양했어요. 군대에서 뭘 좀 배운 다음에 나와서
개업하다가 이거 좀 모자란다 싶으니까 다시 모교 들어가서 레지던트 한 2, 3년 하다가 또
나오고. 뭐 이런 경우가 많았지요. 그걸 이해하셔야 될 거예요. 그래서 우리 같은 그룹은 자
부심이 있었죠. 정식으로 과정을 밟았다. 당시 교수님들도 교수생활 좀 하다가 개업하고 다
그랬으니까요.
사진 5. 교토에서 학술대회 참가 중 은사 김채원 교수와 함께(1982년, 우측이 김채원 교수)186 ┃ 연세의사학 제27권 제1호
세브란스 정신과의 특징, 세브란스 정신과라고 그러면 연구 등에서 다른 대학과 차별되는 특징
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일제 말기에 맥라렌 교수도 떠나고, 이어 주임교수가 된 이중철 교수님(1927년 세브란
스연합의학전문학교 졸업)도 무슨 사정으로 학교를 떠나 세브란스 정신과가 없어졌거든
요. 학생 강의는 신경내과 선생님이 했는데, 해방 이후에는 청량리 뇌병원 원장하시던 세브
란스 출신 최신해 선생님(1941년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졸업)이나 서울대 정신과 교
수였던 세브란스 출신 남명석 교수님(1938년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졸업)께서 오셔
서 강의를 하고 계셨어요. 그리고 김채원 선생님이 미국서 연수 끝나고 돌아와서 다시 정신
과를 만들었습니다. 그분이 미국에서 배운 게 그 당시에 이제 막 번성하고 있는 정신약리학
과 그에 기초한 생물정신의학이었어요.
정신약리학은 당시 막 시작되는 신학문이었습니다. 정신과 약물이 개발된 건 정신의학
사에서 혁명이라고 부를 만큼 대사건이에요. 1940년대 말부터 리튬(lithium)이 조증에 쓰
이다가 1950년대 중반에 클로르프로마진(chlorpromazine)이라는 약이 발견이 됐어
요.3) 발명이 아니고 발견. 감기 기침에 쓰는 약이 하나 개발되었는데 불란서의 한 정신병
원 원장이었던 어떤 의사가 그 약을 감기 환자한테 줬더니 기침에는 별 소용이 없었는데 환
청, 망상이 없어지는 거예요. 그래 놀래가지고 이걸 조사해가지고 클로로프로마진이라는
약이 발견되었어요. 그게 전 세계로 퍼졌죠. 1960년대에 항우울제가 나오고, 1960년대 말
에 신경안정제 리브리움, 발륨(librium valium) 등등 소위 안정제가 나와서, 이게 급속도
로 세상에 퍼지지. 그러니까 제약회사가 돈을 엄청 벌었어요, 그래서 막 신약을 개발하는
거예요. 신약을 개발하니까, 실험을 해 봐야 되잖아요? 그러니까 환자가 필요하지 않습니
까? 그러니까 병원하고 계약을 맺어서 임상 실험을 하는 거예요. 예를 들어 대학병원에서
2상, 3상 실험을 한 다음에 정부허가를 얻어 판매를 하잖아요. 근데 이런 약물들이 당시 막
경제발전을 하고 있던 한국에 이제 밀려오기 시작한 거예요. 김채원 선생님이 과를 개설했
을 때, 미국서 당시 막 성장하던 정신약리학과 생물정신의학을 공부하고 왔기 때문에 한국
에서 그 방면에 선구자가 되셨습니다.
당시 다른 대학병원 정신과에서도 약은 썼지만, 이걸 전공으로, 미래 먹거리로 보는 그런
3) 클로르프로마진은 1952년 프랑스에서 정신의학 관련 질환자에게 사용되기 시작되었다. 관련 내용은
에드워드 쇼터, 최보문 역, 정신의학의 역사(바다출판사, 2020), 408-419쪽을 참조.세브란스 정신약리학의 계보를 잇다, 민성길 ┃ 187
식의 발상이 없었죠. 그 당시에 정신과의 분위기는요, 정신분석이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예
를 들면 우리나라 사람들한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Oedipus complex)가 있느냐, 이런
거 가지고 논쟁하고. 또 한국에는 히스테리가 있냐, 없냐 이런 거 가지고 논쟁하고. 또 ‘신
화와 전설을 분석한다’ 이게 유행이었어. (웃음). 1960년대 당시 한국 정신의학에서의 이
론과 치료에서의 대세는 정신분석에 기초한 정신치료, 즉 말로 하는 치료였습니다. 저는 이
게 좋아 정신과를 택했죠. 당시까지는 정신은 정신으로 치료한다 라는 거였거든요.
그런데 이제 정신병 치료한다는 약이 소개되기 시작한 거예요. 우리 김채원 선생님께서
미국에서 귀국하셔서 처음 학회에서 한 강연이 조증에 쓰는 리튬이라는 약물을 소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가지고 그분이 학회 안에서는 일약 정신약리학으로 유명해졌어요. 그
러니까 세브란스가 이제 약물치료 연구로 유명해진 거예요.
저도 의대생 때 정신분석에 대한 강의를 듣고 정신과 공부를 결심했거든요. 그런데 그쪽
으로 계속 관심 있는데 김채원 선생님이 신약을 실험하라고 주니까 ‘예’ 하고 알아서 임상
실험하는 방법을 혼자 책으로 배워가지고 그냥 그거 하고, 보고서 갖다 드리면 선생님이 그
걸 보건사회부에 내고, 이런 걸 했어요. 나도 모르게 그냥 약물학의 대가가 된 거야. 임상실
험하고 보고서도 쓴 다음에 논문도 썼으니까. 그래서 아 이걸 내가 일단 해야겠다 해서 열
심히 했습니다. 당시 내 머리는 “마음에 대한 약“(drugs for mind)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
다. 그랬더니 내가 중견이 됐을 때 좋은 세상 만났죠. 많은 제약회사가 다 나를 찾아오는 거
야. 이거 임상 좀 해줄 수 있느냐 이거지. 3상 시험.
동시에 부담감도 있지 않으셨나요?
있었죠. 그래서 제대로 하려고 노력했지. 내가 지금도 스스로 고맙게 생각하는 게, 내가
허투루 한 건 아니었거든요. 그 이유 중에 하나가 임상시험 방법을 제대로 배울 기회가 있
었거든. 그건 1980년에 덴마크 코펜하겐 의대 정신과에 연수갔을 때였어요.
당시 내가 외국에 공부하러 가고 싶어가지고 안달을 했어요. 김채원 선생님한테 내가 학
교에 들어온 지가 지금 4년이 넘었는데 왜 나 외국 공부 안 시켜주냐고 막 했더니, ‘가만있
어, 정신과 일이나 해’ 그러시더라고.
그러고 마침 짧은 기간 해외연구를 나갈 기회가 생겨 선생님께 허락을 받아 냈죠. 3개월
간 덴마크 문부성 장학생으로 코펜하겐대학 정신과로 갔습니다. 거기 주임교수는, 나중에 188 ┃ 연세의사학 제27권 제1호
깨달았는데, 라파엘슨(O. J. Rafaelsen) 교수라고 당시 세계적으로 유명한 정신약리학 학
자였습니다. 2016년 제가 국제신경정신약리학회에서 선구자 상을 받았는데, 라파엘슨 교
수는 그 창립멤버였어요. 그런데 그 정신과는 룬드벡(Lundbeck)이라는 덴마크의 한 제약
회사와 특별한 관계를 가져 신약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었거든요. 그런 데다가 부설로 정신
화학연구소(psychochemistry institute)를 운영하고 있었어요. 정신화학이라니, 마음의
비밀을 정신분석이 아니라 화학으로 연구한다? 곧 이거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유시간에 연구소 도서관에 가서 책을 살펴보는데, 클리니컬 리서치라는 책4)이 있더라
고요. 그래서 빼서 읽어보니까 어떻게 연구대상 환자를 모으고, 어떻게 실험군과 비교군
(통제군)을 나누고, 또 설문지를 어떻게 만들고, 통계 방법은 뭐고 이걸 설명한 책이더라고
요. 그래서 이걸 내가 서울로 갖고 왔어요. 한국에 와서 다시 잘 읽어보고 정리해서, 임상연
구에 써 먹었습니다.
여하튼 코펜하겐 대학에 있을 동안 연구원들에게 임상연구에 참여시켜 달라고 졸랐죠,
그래서 입문을 허락 받았습니다. 신약에 대한 기초 실험인데, 자원하는 정상인들에게 약물
을 투여하고 한밤중에 시간 맞추어 입에서 나오는 침을 모아 무게를 재고, 약물의 혈중 농
도를 측정하기 위한 피를 뽑는 일을 했습니다. 나중 제3저자로 논문5)이 나왔어요. 저의 첫
국제논문이었죠. 이때 실험했던 약물들은 지금 세계적으로 잘 팔리고 있죠. 정말 좋은 경험
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임상 정신약리학 연구를 열심히 하다 보니 세브란스가 정신약리학 그걸로 아주
유명해지고 김채원 선생님이 은퇴하신 다음에 내가 한동안 한국의 정신과 약물 치료의 대
가라는 영예를 누렸죠. 임상정신약리학이라는 책을 개정3판까지 내었어요.
정신약리학을 하시면서 임상의 중요성을 더욱 중요하게 여기셨을 것 같습니다.
나의 정체성이 뭐냐고 물어본다면, 지내온 것도 그렇고 지금도 그런데, “나는 클리니션
(clinician)이다”라는 것입니다. 나는 그냥 임상의사예요. 무슨 학자나 사상가가 아니라 좋
4) W. P. Small, Urban Krause, An Introduction to Clinical Research (Edinburgh: Churchill
Livingstone, 1972).
5) Clemmesen L, Jensen E, Min SK, Bolwig TG, Rafaelsen OJ, “Salivation after single-doses
of the new antidepressants femoxetine, mianserin and citalopram. A cross-over study,”
Pharmacopsychiatry 17, 1984, pp. 126-132.세브란스 정신약리학의 계보를 잇다, 민성길 ┃ 189
은 크리스천 클리니션. 그리고 리서치는 클리니컬 리서치(clinical research). 그리고 그
거를 후학들한테 교육한다. 이걸 나의 정체성으로 삼고 있어요. 사실은 뭐 나는 환자만 봤
으니까. 그리고 연구도 모두 환자를 통한 연구지, 대학원에서는 물론 기초 실험을 했지만,
주로 환자를 통해서 데이터 모아서 그걸 논문으로 쓰고 그랬죠. 그래서 그게 난 참 좋았다
고 봐요. 그리고 그런 클리니컬 리서치가 사실 베이직 리서치(basic research)만큼 중요
하다 하는 것을 잘 깨닫고 있습니다,
사진 6. 2016년 국제신경정신약리학회(CINP) 선구자상 수상
정신약물학회도 창설되었다고 들었는데, 어떤 과정으로 설립되었는지, 세브란스 출신들의 활
동은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대한정신약물학회는 1985년 2월 28일에 창립했어요. 당시 정신약물학회에 조금 앞서
서 서울대 의대 중심으로 고려대 의대와 카톨릭 의대 등이 생물정신의학회를 창립했는데,
그때 우리 쪽에 같이 하자고 협조를 구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우리는 김채원 선생님을 모시
고 대한정신약물학회를 만들었어요. 김채원 선생님이 초대 회장을 하셨고, 저는 총무이사190 ┃ 연세의사학 제27권 제1호
로 창설 업무를 총괄했죠. 자연스레 창립 멤버 대부분이 연세대 의대하고 당시 우리와 상호
교류하던 경북대 의대 출신의 정신과 의사들이 주축을 이뤘어요.
저는 첫 총무이사로 이후 12년 동안 총무이사를 연임하면서 학회의 살림을 도맡았어요.
창립하고 몇 년 지나면서 학술대회는 물론 학술지도 만들고 학회 규모가 빠르게 커졌습니
다. 지금 정신과 분과학회로서는 가장 크고 활발해요.
소아정신과, 의학행동과학연구소, 통일연구원
정신과 주임 교수로 계실 때 소아정신과를 창설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네, 소아정신과 만드는 거는 정말 잘한 거죠. 그 이전에는 소아정신과 환자들은 나를 포
함한 일반 정신과 교수님들이 다 보고 있었어요. 하나의 독립된 과로서의 소아정신과는 서
울대학에만 있었어요. 소아정신과라고 하려면 소아정신과 펠로우를 트레이닝하는게 중요
한 조건이야. 그래서 소아정신과를 정식으로 만들려면, 소아정신과 트레이닝하려면 지도
교수가 있어야 되요. 그때 마침 미 8군 병원에 와 있는 내 동기 전여숙(1968년 연세의대 졸
업)이라는 분이 있었어요. 미국 소아정신과 전문의, 대령이에요 아직도 미국 월터 리드
(Walter Reed) 병원에서 일하고 있어요. 내가 그 분 보고 와서 트레이닝을 도와 달라 했
죠. 미8군 군인이 왜 세브란스 와서 일을 합니까? 근데 그때 한국은 한다 하면 또 하는 거
야. 그래가지고 이제 시작됐죠. 그게 1994년 3월부터였죠.
제일 첫 졸업생 정유숙 선생님(1988년 연세의대 졸업)을 삼성병원에, 그리고 육기환 선
생님(1989년 연세의대 졸업)을 차병원에 교수로 보냈어요. 당시 삼성병원 소아정신과장이
서울대 출신인데 미국에서 소아정신과 전문의 였어요. 이분이 세브란스에서 소아정신과
트레이닝을 한다니까 ‘삼성병원에 정신과를 지금 만드는데 스텝할 분 보내달라’ 그러더라
고. 그래서 삼성병원 소아정신과 선생님은 세브란스 출신이에요.
세브란스에서 소아정신과라는 행정부서가 시작된 건 어린이병원 소아정신과인데, 이건
2006년 5월에 신의진 교수(1989년 연세의대 졸업)를 과장으로 해서 시작됐죠.
동시에 임상심리검사실 기능을 확대하여 임상심리사를 수련하는 정규 실도 만들었어요.
연대 심리학과 오경자 교수님과 협력하였지요. 세브란스 정신약리학의 계보를 잇다, 민성길 ┃ 191
사진 7. 연세대 의과대학 수학여행에서 제자들과 함께(1989년)
정신과에서 많은 역할을 하셨는데, 2000년에 의학행동과학연구소를 설립하신 것도 그중 하나
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건 어떤 역할을 하는 연구실이었는지요?
그때 과마다 연구소 하나 하는 게 유행 같았어요. 소아과의 허약아동연구소라던가, 기생
충학교실에 열대의학연구소라던가, 이런 식으로. 내가 과장 할때 하나 만들기 원했습니다.
당시 이미 김채원 선생님이 미국에서 행동과학이라는 교과목을 우리 의대에도 도입해서
학생들한테 가르치고 있었어요. 근데 내가 미국 갔을 때 정신과 과 이름 중에 Department
of Psychiatry and Behavior Science라는 것이 많아요. 그래서 거기서 아이디어 얻어가
지고, 우리도 행동과학과까지 만들 건 없으니까 연구소를 만들어서 갖다 붙이자. 미국의 의
과대학에서는 행동과학이라는 걸 주로 정신과가 해요. 이것은 정상행동(normal behavior)
연구예요. 정신과는 비정상행동(abnormal behavior)를 다루잖아요? 그러니까 당시 미국
에서 정상 인간행동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분위기가 의학, 심리학, 사회과학에서 붐으로 일
고 있었어요. 지금도 사회과학이나 경제학에서도 다 행동과학을 연구합니다. 예를 들면 경제
학에서 어떻게 한 사람이 비싼데도 불구하고 그 물건을 사는가 하는 행동을 연구하는 거예
요. 행동경제학이라고 그러죠. 이런 게 의학에도 당연히 있겠죠. 가장 큰 주제는 의사-환자 192 ┃ 연세의사학 제27권 제1호
관계, 의료 윤리 같은 겁니다. 그리고 그걸 의과대학에서 할 만한 거는 정신과가 당연한 거예
요. 어차피 병적 행동을 연구하니까.
김채원 선생님이 행동과학 교과목을 만들어서 1학년 한 학기 2시간으로 넣었어요. 그 때
갈등이 많았습니다. 각 과에서 서로 강의 시간 많이 차지하려고 다툴 때인데 김채원 선생님
이 한 교과목을 집어넣으니까 또 다른 과가 그만큼 시간을 뺏기게 되잖아요? 그러니까 논
쟁이 났는데, 그때 무슨 얘기까지 했냐, 세균 행동도 강의해야 된다고. (웃음). 이후 다른 의
대들도 따라 했습니다.
근데 연구소 만드는 건 본교의 허락을 받아야 되거든요. 그걸 관리하는 상대(商大) 교수
가 연세대에 이미 행동과학연구소가 있다 이거야. 그래서 이름 앞에 의학을 붙였죠. 의학행
동과학연구소라고.
처음에는 나 혼자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면서 일을 만들어서 행사를 많이 열었어요.
당시 제약회사 광고를 얻어 의학행동과학이라는 종합학술지도 만들어 총 6회 발간하였
습니다. 요즘 와서는 연구소를 연구에 활용을 많이 해요. 연구 교수도 발령하고 연구비도
그쪽으로 해서 받고.
2000년에는 연세대 통일연구원 원장도 역임하셨던데, 어떻게 맡게 되셨나요?
당시 남북문제가 호전되면서 각 대학에 통일연구소들이 많이 생겼어요. 연세대학교에서
는 송자(宋梓, 1963~2019) 총장이 통일연구원을 창설했는데, 제가 이영선 교수, 문정인
교수에 이어 3대 원장(2000-2002)을 했어요. 당시 저는 전우택 교수(1985년 연세의대 졸
업)와 같이 탈북자 남한사회 적응에 대한 연구를 한창 많이 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어필했
다고 봅니다. 의대교수가 본교 보직을 맡은 게 특이하다 했어요. 당시 제 대표 저술이 통
일이 되면 우리는 함께 어울려 잘 살 수 있을까(연세대학교출판부, 2004)였어요.
제가 학생 때 정신분석과 정신치료에 관심이 많아 정신의학을 전공하였듯이, 정신약리
학을 전공하면서도 사회문화 현상에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화병 연구는 물론 정신대 할머
니들의 PTSD연구도 그중의 하나지요.
당시 젊은 일본 제3세대 제일교포 정신과의사, 이창호 선생이라고, 어느 날 문득 날 찾아
와 “한국” 정신의학을 배우겠다고 해요, 그래서 학교에 펠로우 자리를 마련해주고 한 일 년
반을 나와 같이 있었습니다, 그 친구가 재일교포로서의 정체성에 심적 고통이 많았던 것 같세브란스 정신약리학의 계보를 잇다, 민성길 ┃ 193
아요. 정신대 할머니들을 연구하자 그랬어요, 그래서 우리 정신과 내에 팀을 만들어 전국의
정신대 할머니들을 찾아다니며 면담했습니다. 그 결과는 한국 정신과 학술지에 발표되었
는데, 나중에 이스라엘 정신의학지에 영문으로 전재되어 세계적으로 알려졌지요.6)
기독교에 많이 영향을 많이 받으셔서 정신의학과 목회자와의 대화 프로그램도 진행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예 했었어요. 그래서 한 6년 내내 했는데, 1년에 한 차례씩 목사님들, 사모님들, 신학생들
을 대상으로 했습니다. 호응이 좋았는데, 지금은 안해서 아쉽죠. 연세대학교가 기독대학인
데 말입니다.
맥라렌 연구
말씀이 육신이 되어: 맥라렌 교수의 생애와 사상(연세대학교 대학출판문화원, 2013)이라는
책을 내셨습니다. 세브란스 정신과 초창기를 일구어 놓으신 교수님이시라 관심이 많으실 것 같
기는 하지만, 기독교 정신하고도 연계시켜서 더 관심이 많으신 것 같은데요. 어떻게 맥라렌 교
수에 대해서 정리하실 생각을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일제시대 때 우리 세브란스에 정신과가 있었다는 것은 잘 몰랐습니다. 근데 유계준 선생
님(1961년 연세의대 졸업)은 들은 얘기가 있으니까 ‘옛날에 선교사가 와 있었다고 그러더
라.’ 그래서 ‘그래요?’ 그리고 우리는 무심하게 지냈죠.
그런데 연세대학교 100주년 기념할 때, 의과대학이 100주년의 핵심이잖아요. 세브란스
병원에서 연세대학이 시작되었으니까. 그래서 의대 학장 명의로 각 과별로 교실사를 써서
제출하라고 그랬어요. 김채원 선생님이 나보고 네가 써라 이거예요. 내가 쓰려니까 아는 게
뭐 있어야죠.
6) 이창호, 심은지, 민성길, 김주영,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들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관한 연구」,
대한신경정신의학회지 43(6), 20 0 4; Min SK, Lee CH, Kim JY, Shim EJ “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in Former Comfort Women,” Israel Journal of Psychiatry and Related
Science 43, 2011, pp. 161-169.194 ┃ 연세의사학 제27권 제1호
기생충학교실 소진탁 선생님(1941년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졸업)이라고 김채원
선생님하고 친해요. 당시 김채원 선생님하고 친한 몇 분 교수님들이 있어 늘 저희들에게
‘잘해, 열심히 해’ 그러셨지요 그때는 그렇게 교수들과 제자들 간에 개인적인 관계가 많았
습니다. 옛날에는 의과대학이 그냥 한 가족이야. 웬만한 레지던트는 다른 과 선생님들도 다
알아요. 소진탁 선생님이 역사 얘기를 듣고 ‘옛날 맥라렌 선생님의 자료를 내가 좀 갖고 있
으니까 너 줄게 이걸로 해봐’ 하고 자료를 한 뭉치를 줬어요.
그래서 읽어보니까 세상에 기가 막힌 거야. 나로서는 놀랠 노자죠. 그래서 여기저기서 자
료를 모았죠. 그래서 일단 학교에 보고서를 내었고, 그게 의학백년(연세대학교 출판부,
1986)에 실렸습니다.
은퇴후에 본격적으로 맥라렌교수에 대해 자료를 모으고 연구했습니다. 새삼 그분의 신
앙과 인품과 일제 강점기 조선 땅에서의 헌신을 알게 되어 얼마나 감명을 받았는지 몰라요.
저의 평소 정신과 의사로서의 정체성을 새로이 했습니다. 일단 그분의 전기와 학문에 대해
논문을 모아서 책을 썼습니다. ‘조선땅에 맨 처음 온 (서양) 정신과전문의’라는 내용이에
요.7) 그리고 강조한 것은 일제강점기 때 맥라렌이 제자를 키워 자신의 후임 교수로 하였다
는 거, 그 한국의 첫 정신과 의사가 이중철 선생이다. 그걸 그냥 막 떠들었습니다. 모두 인
정을 해주는데 서울대학에서 조금 다른 소리를 해요. 한때 연세의대와 서울의대 사이의 뿌
리논쟁 아시죠? 모든게 서울대학이 최초라고 하는데,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신경정신과에
한국인 교수가 있느냐 물으면 없어요. 경성제국대학에서는 한국인을 교수로 키우지 않았
으니까. 가장 이름난 분이 명주완 선생님인데, 그는 조수(일종의 레지던트) 끝나고 그냥 개
업해 나갔어요. 나중에 해방 후에 서울대 의과대학 학장을 했지만.
저는 맥라렌은 슈바이처보다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아프리카에 그 오봉강8)인가? 강
옆에 진료소 해가지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클리닉이 됐잖아요? 근데 지금은 거의 뭐 폐쇄된
상태예요. 그렇게 개인은 유명해졌지만, 지금 아프리카에 슈바이처가 일하던 병원, 후계
자? 그 지역에는 뭐 남은 게 없어요. 근데 세브란스는 어때요 지금? 그러니까 슈바이처보다
한국에 와 있던 선교사들이 더 위대한 거예요.
맥라렌의 생애를 연구할 때 기독 교회사 하는 분들이 도와줬어요. 애초 역사학자 이만열
7) 민성길, 「맥라렌 교수 (1): 그의 생애와 의학철학」, 신경정신의학 50, 2011; 민성길, 「맥라렌 교수
(2): 그의 영성 정신의학 이론」, 신경정신의학 51, 2012.
8) 가봉 오고웨(Ogowe) 강을 의미한다.세브란스 정신약리학의 계보를 잇다, 민성길 ┃ 195
교수께서 맥라렌에 심오한 것이 있다고 한번 연구해 보라고 자극을 주셨고, 한국 기독 교회
사 전공이신 고신대학 이상규 교수님하고, 그다음 서울 장신대에서 교회사 전공하시는 정
병준 교수님, 그분들이 많이 도와줬죠. 그리고 우리 처형이 호주에 이민 갔는데, 그 양반이
호주 장로교 문서실에 들어가 뒤져서 자료들을 카피해서도 많이 보내주고. 이래저래 자료
를 모아서 정리한 겁니다.
세브란스인에게 한 마디
저희가 항상 여쭤보는 마지막 질문인데요, 세브란스인에게 한 말씀 해주셨으면 합니다.
세브란스 창립 기독교 정신을 유지해라 그거예요. 기독정신이야말로 우리가 지켜야 할
연세의대의 전통이죠.
이 얘기 곁들어서 한 번 말씀드린다면, 고 강진경 선생님(1965년 연세의대 졸업)이 의료
원장 할 때 사실 세브란스가 굉장히 곤경에 처했어요. 그래가지고 판다는 말이 나왔다고.
LG가 사겠다고도 했어. 그랬는데 들리는 소리가 병원 이름을 LG 세브란스로 하라, 이렇게
요구한다 이거예요. 그랬더니 모두 화가 났어요. 거기다 어떻게 LG를 붙이냐 해서 이게 무
산이 됐어요. 그리고 언제인가 강진경 원장님이 경영 쇄신을 위해서 경영 진단을 받았어요.
갈렙이라는 회사에 부탁해서. 이 사람들이 와서 1년여 동안 여기저기 조사하고 해서 세브
란스가 다시 살아나기 위해서는 어떤 경영정책을 세워야 되느냐? 그리고 레코멘데이션
(recommendation)을 내놨어.
그 발표할 때 우리 교수들이 다 참석해서 그걸 들었거든요. 근데 그 갈렙이 조언하는 게,
앞으로 세브란스가 살아날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방법은 창립정신인 기독교를 프로모션
하라 이거예요. 그동안에 많은 사람들이 세브란스가 기독교 병원인지 잊었죠. 이름이 왜 세
브란스인지도 모르고, 그냥 재벌이 하는 줄 알아요. 내가 한번 택시 타고 들어오는데 운전
수가 ‘야 이 병원 되게 잘 지었네. 이거 어느 재벌에서 하는 거예요?’ 이러더라고요. 여하튼
경영진단에 따라 그럼 병원에서 기독교를 알리기 위해 어떻게 하느냐 해가지고 아이디어
를 모았는데, 복도에 찬송가 트는 거, 교목실과 원목실을 확장하고, 또 선교센터를 만들고,
그걸 홍보하고. 새 병원에 들어가자마자 큰 족자 있잖아요. 그거 뭐라고 썼는지 알아요? ‘여196 ┃ 연세의사학 제27권 제1호
호와는 나의 구원이시다.’ 성경 구절이에요. 이사야서에 나오는. 여기저기에 기독교 관련
자료를 전시하고 그랬어요. 그러면서 병원 상황이 서서히 좋아졌어요.
근데 이 얘기가요, 일제시대 때도 한 번 있었답니다. 일제시대 때도 1930년대인가 한때
병원 경영이 잘 안돼서 선교사들이 교회를 세우고 전도를 하지 왜 병원을 해야 하느냐 그런
논의가 있었대요. 그게 우리가 볼 때는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에요. 그때 결정이 병원 그만
두고 나가서 선교에나 충실하자 그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랬는데 당시 맥라렌 교수
가 그때 어떤 역량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전해지는 전설에 의하면 ‘육체의 구원도 영혼 구
원이다. 선교병원은 반드시 해야 된다’ 이런 식의 얘기를 했다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당시
세브란스도 병원은 계속하되, 기독교 선교도 강화하기로 해서 오히려 병원이 잘 됐다는 그
런 말 들었습니다. 지금도 같은 스토리가 되는 거죠. 그래서인지 지금 우리 병원이 한국 최
고로 잘 되고 있잖아요?
정신과교실의 전통을 살려 정신약리학이 발전하면 좋겠다는 말도 남기고 싶습니다. 정
신약리학은 현재 뇌과학의 핵심입니다. 정신약물이 작용하는 곳은 신경 시냅스입니다. 요
즈음 사회문제가 되는 마약도 이 시냅스에 작용하죠. 현대 과학은 시냅스와 관련하여 유전,
분자생물학, 신경신호, 마약, 등을 연구하고 있어요, 더구나 정신약물은 정신장애 치료까지
하지 않습니까? 정신약리학은 신경과학과 정신의학 그리고 행동과학의 꽃입니다. 언제인
가 정신치료와 약물치료의 공통의 장이 발견될 겁니다. 좀 과장하여 말한다면 시냅스를 통
해 우주를, 하나님의 창조섭리를 엿볼 수 있다고 봅니다. 덴마크를 보십시오. 작은 나라지
만, 신약개발로 엄청난 국부를 만들어 내지 않습니까? 우리 모교에 이 계통의 학문이 번창
하기를 원합니다. 세브란스 정신약리학의 계보를 잇다, 민성길 ┃ 197
사진 8. 2024년 5월 10일 인터뷰 당일 민성길 명예교수
오늘 장시간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네 나도 고맙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말씀 남기고 싶네요. 내 평생에 걸쳐 부모님의 기도
가 전적인 도움이 되었다고 봅니다. 당시 부모님들이 대개 그러하셨지만, 자식을 위한 기도
와 교육열이 남달랐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물론 결혼한 이후에는 아내도 열심히 나를 위해
기도하여 왔습니다. 그래서 남은 삶은 진실된 크리스천 의사로서 봉사하려 합니다. 감히 말
씀드립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
니하여 ……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린도전서 15:10).
원로와의 대화
세브란스 정신약리학의 계보를 잇다, 민성길
의사학과
민성길(閔聖吉)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정신과학교실 명예교수는 1944년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출생했다. 민 명예교수는 유년시절을 마산에서 보낸 후 서울로 이사하여 대광고
등학교를 졸업했다. 1962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하여 1968년 졸업하였고, 1975
년에는 연세대학교에서 의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민성길 명예교수는 의대 졸업 직후인 1968년부터 1973년까지 세브란스병원 정신과에
서 인턴・레지던트 과정을 거쳤으며, 레지던트 4년 차인 1973년에는 전라북도 김제군 백산
면 무의촌에서 6개월 간 근무했다. 이후 신경정신과 전문의 자격을 취득한 민 명예교수는
1973년 군의관으로 입대하여 육군 제59후송병원 신경정신과 과장, 국군광주통합병원 신
경정신과 과장을 역임했다. 제대와 함께 1976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정신과 교수로 임용
되어 2009년까지 봉직했다. 1994년부터 2000년까지는 정신과학교실 주임교수 및 세브
란스병원 정신과 과장을 역임하며 소아정신과, 의학행동과학연구소 및 임상심리학실을 창
설했고, 이후 연세대학교 통일연구원 원장(2000~2002)을 역임하며 탈북자의 정신건강을
연구하는 등 세브란스 정신과의 전문영역을 확장하는 데 기여했다.
민 명예교수가 큰 족적을 남긴 분야는 정신약리학이다. 한국 정신약리학의 개척자 중 한
명인 은사 고(故) 김채원 교수(1948년 연세의대 졸업)의 뒤를 이어 정신약리학 연구에 매진
한 민 명예교수는, 1985년 대한정신약물학회 창립 멤버로서 이후 12년 동안 총무이사를 역
임하며 학회 발전의 초석을 세운 뒤 대한정신약물학회 이사장 및 회장(1997~2002)을 지
냈다. 그 외 학회활동으로는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이사장(1999~2001), 대한사회정신의학
회 회장(2000~2002), 대한임상독성학회 회장(2003~2007)을 역임했다. 주요 저서로는
임상정신약리학(중앙문화사, 초판 1994; 개정판 2003; 3판 2007)이 있으며, 정신의학
분야 교과서인 최신정신의학의 초판(일조각, 1987)부터 7판(2023)까지 대표저자를 맡
았다. 이외에도 화병, 약물남용, 탈북자 남한사회 적응, 세브란스의 첫 정신과 교수 맥라렌
(Charles Inglis McLaren, 1882~1957)에 대한 연구, 독일 작가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 1877~1962)에 대한 연구 등을 진행하며 여러 저술을 남겼다.
민성길 명예교수는 이러한 학술적 공로를 인정받아 연세학술상(1995), 대한정신약물
학회 공로상(2002), 대한신경정신의학회 공로상(2003), 대한민국 녹조근정훈장(2009),
서울시의사회 저술상(2010), 국제신경정신약리학회(CINP) 선구자상(2016) 등을 수상
하였다.
민 명예교수는 정년퇴임 이후 서울특별시 은평병원 원장(2009~2013), 용인 효자병원
원장(2015~2023)을 역임했고, 2024년 현재는 연세카리스 정신건강의학과 및 가족연구
소에서 진료의사이자 연구자로서 임상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최근에는 기독교와 정신의
학의 관계, ‘전통적 기독교 가족윤리 옹호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다.
인터뷰는 2024년 5월 10일 오후 2시부터 4시 30분까지 서울 도곡동 카페에서 진행되
었다. 인터뷰는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의사학과 김영수 교수가 진행하였다. 인터뷰의 첫 문
답을 제외하고는 성명을 표기하지 않았다. 본문의 괄호는 편집자의 부연 설명이며, 정리는
의사학과의 강재구 조교가 담당하였다.세브란스 정신약리학의 계보를 잇다,
2024년 5월 10일, 민성길 명예교수님 모시고 인터뷰 시작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민성길: 네 안녕하세요.
출생 및 가족관계
먼저 가장 기본적인 부분 여쭤보겠습니다. 출생 및 가족 관계에 대해서 말씀 부탁드립니다.
출생은 아버지께서 목회하고 계셨던 경주 인근의 안강(현재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에
서 태어났어요. 해방 후에 아버지께서 여러 지역에서 목회를 하시는 바람에 함양군 안의,
구포, 그리고, 김해에 살다가, 마산으로 왔습니다. 마산 월포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마산중학
교에 다니다가 서울 와서 대광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그리고 그 해 연세대 의예과에 입
학하였습니다. 어쨌든 마산에서 주로 유년 시절을 보냈어요. 저의 어린 시절 추억은 마산에
있습니다.
아버님 집안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시죠.
뭐 기회가 주어지면 아주 자랑스럽게 얘기하는 건데, 경상남도 산청군 생초면 대포리라
는 마을의 민씨 집안입니다. 우리 선조가 민안부(閔安富)라고 그래요. 이분이 고려가 망할
당시 고려왕조의 말하자면 장관격인 판서였대요. 그러다가 이조가 되면서 옛날 고려왕조
때 귀족들을 다 잡아다가 가뒀잖아요. 두문동 70인1)이라는 그런 조직. 이성계가 한 동네에
다 가둬놓고 못 나오게 했어요. 그리고 귀양을 보내는데 우리 할아버지가 경상도로 귀양을
가다가 경상도 생초 땅에 이르렀을 때 여기가 큰 개울이라는 뜻에서 ‘한 개(현재 생초면 대
포리)’라 이름 짓고 따라온 관원들을 돌려보내고 거기서 눌러 살았습니다. 그리고 우리 자
손은 절대로 이조에 벼슬하지 말아라 그랬대요. 그래서 아무도 과거 시험을 안 봤어. 그래
서 몰락한 시골 양반이었죠.
1) 두문동 72현(杜門洞 七⼗⼆賢)을 말한다. 두문동 72현은 고려 멸망 후 조선이 건국되자 조선왕조에
출사하지 않고 두문동에 은거한 고려 유신 72인을 일컫는다.
어쨌거나 그걸 이어받아서 한 500년간 그렇게 살다가 우리가 태어났어요. 아버지는 그
걸 굉장히 자랑스럽게 생각해요. 지조(志操)를 지켰다. 우리 보고도 지조를 지켜라라는 말
씀을 자주 하셨죠. 우리집 가훈이라 할 수 있어요.
아버지는 함양에서 포목장사 하시다가 한 교회 청년에게 전도를 받아 기독교로 개종하
시고 목사가 되기로 하셨습니다. 일본 간사이 성서학교에서 신학공부를 하시고 경주 근처
안강에서 전도사로 처음으로 목회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다가 일제시대 말기 기독교 탄
압이 심해지면서 함양경찰서에 구금되기도 하셨습니다. 그래서 해방 후 같은 장로교회지
만 일제 때 신사참배 반대하던, 신앙의 지조를 지켰던 교파에 합류하셨지요.
고신파라고 들어보셨어요? 아주 펀더멘탈한, 한국 개신교 중에 제일 보수파예요. 그 이유
가 일제강점기 신사 참배를 반대했던 그룹이 예수교 장로회에서 탈퇴해서 조직한 교단이기
때문입니다. 그 효시가 주기철 목사님(朱基徹, 1897~1944)인데 마산, 창원 사람이에요. 주
기철 목사는 순교했죠. 6.25때 순교하셨던 애양원(愛養院)의 손양원 목사님(孫良源,
1902~1950)도 마산 근처 함안 출신입니다. 부산지역의 한상동 목사님을 위시한 소위 옥중
성도들이 해방 후 평양 감옥에서 살아나와 모여서 만든 교단이 장로교회 안에서 고신파라
고 그래요. 고려신학교파예요. 부산에 고신대학교와 복음병원이 있죠. 한국 기독교사에 서
유명한 얘기입니다. 한국교회 분열의 시작이라는 말도 있어요. 일제시대의 후유증이에요.
그리고 일제 때 신사참배를 반대했던 선교사 집단이 경상도 지방에서 선교하던 호주 선
교부였어요. 당시 세브란스 연합의학교에 호주선교사 정신과의사 맥라렌교수가 파견되어
있었는데, 그가 신사참배 반대에 가장 앞장섰다 합니다.
어머님은 어떤 분이셨나요?
어머니는 뭐 우리가 지금 보기에 굉장히 똑똑한 여성인데 여자라서 시집 가서 그냥 평생
남편 뒷바라지하고 자식들 키웠지요. 지금 돌이켜 보면 굉장히 현명한 분이셨어요. 자식들
키우는 거 보면 알죠. 하여튼 나는 의사가 되고 동생은 서울공대 건축과를 나왔어요. 공부
를 열심히 했죠. 내가 의예과 때 성백선 교수가 담당한 심리학 시간이었는데, 의예과 학생
전원이 다 아이큐 테스트를 했더랬어요. 제 아이큐가 별로여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웃음).
근데 지금 생각하면 어머니가 우리를 어떻게 구워 삶았는지 열심히 공부했지요, 참 고맙게
생각해요. 세브란스 정신약리학의 계보를 잇다,
어머니는 아주 현모양처셨고 대단하신 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어머니께서는 결혼 전부
터 어른들 몰래 예배당에 다니셨대요. 만약 공부를 제대로 했으면 뭐 여성 지도자가 됐을
분인데 국민학교만 나왔어요. 공부하고 싶다고 울고불고 그렇게 난리를 쳤는데, 친정 아버
지가 여자가 무슨 공부하느냐고 하셨답니다. 결국 중매로 얼굴도 모르는 남편하고 결혼했
어요. 집안 좋다고 (웃음).
그리고 제 동생은 민현식이라고 그러는데 아주 유명한, 나보다 더 유명한 건축가예요. 한
예종에서 교수하다가 지금 은퇴하고 설계사무소 하고 있는데, 김수근(⾦壽根, 1931~1986)
이라는 건축가의 직계 제자 중에 하나예요. 누이동생은 민성희라고 하는데, 결혼해서 그냥
주부로 살았는데 결혼하기 전에 소셜워커로 일했어요. 그때는 잘 몰랐는데 매춘하던 여성
들 갱생 사업을 했습니다. 좋은 일 많이 했죠.
지금 가족 관계는 어떻게 되시나요?
집사람하고 아들 둘, 며느리 둘이 있고 손자가 둘, 손녀가 하나. 집사람은 문경덕. 연세대
음대 출신인데, 교회 성가대에서 만나 알게 되었고 결혼하였습니다. 큰 아들은 연세대 전자
공학과를 나와 삼성전자에 다녔습니다. 큰 며느리는 연세대 국문과를 나와 교사를 하고 있172 ┃ 연세의사학 제27권 제1호
는데, 딸과 아들을 두고 있습니다. 둘째는 연세대 전산과를 나와 인텔에서 근무하고 있고,
며느리는 이대 도서관학과를 나왔고 지금 주부입니다. 아들 하나를 두고 있지요.
기독교와의 만남
유년 시절 성장 과정에 대해서 좀 여쭤보고 싶습니다. 선생님께서 독실한 크리스찬이시라고 들
었는데요, 기독교와의 만남에 관한 부분, 그러니까 기독교의 영향을 언제부터 받으셨는지 궁금
합니다.
저는 아버님이 목사님이시니까 뭐 모태 신앙이죠. 근데 아버지가 목사님이시긴 했지만,
완전히 요즘 말로 구닥다리 유교 집안, 양반이라고 자칭하는 집안의 후손이거든요. 그래서
기독교를 믿지만 유교적으로 엄하셨어요. 돌이켜보면 참 자상하신 분이었는데 우리는 좀
엄격하다고 봤죠.
어릴 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제 일상생활은 거의 교회와 학교, 병원뿐이었습니다.
어머님께서도 항상 말씀하시기를 “너는 목사 아들이니 잘해야 한다”고 강조하셨어요. 의예
과 때도 채플에 충실하게 참석했고, 본과 가서도 매일 아침 학교채플에 참석했어요. 교수로
있는 동안에는 교수로서의 커리어를 쌓는데 올인했지만, 최소한 주일만은 교회에서 시간
을 보냈어요. 1968년 이후 55년간 아버지가 개척하셨던 한 교회에 다니고 있는데, 젊어서
는 성가대, 주일학교 교사 등을 했고, 나중에 장로로 피택되었습니다.
의학에의 관심
의학을 전공하시기로 마음을 먹으신 계기가 있으신지요?
내가 대학 입학할 당시는 5.16혁명 다음 해 였는데, 공대가 굉장히 인기가 좋아서 커트라
인이 의대보다 높았어요. 의사가 되는 거는 부모님들의 소원이였죠. 왜냐하면 옛날에 다 가
난할 때 잘 사는 사람은 다 의사였으니까. 하여튼 아버지는 나보고 당신에 이어 목사 하라
고 하셨지만, 우리 어머니가 의사 하라고 그러셨지요.세브란스 정신약리학의 계보를 잇다,
의대에 진학하실 때 영향을 끼친 의사가 있으셨는지요? 그리고 그때 의사에 대한 어떤 이미지
를 가지고 계셨는지요?
국민학교 시절에 아버지께서 부산 복음병원에 나를 데리고 가서 장기려 박사님께 인사
를 시키신 적이 있어요. 그때 의사란 훌륭한 사람이구나라는 강한 인상을 받았죠. 이후에
그분을 직접 만난 적은 없었지만, 그의 삶을 추적하면서 존경하는 마음은 늘 있었어요. 그
리고 의사에 대한 이미지는 당시 유명하셨던 알버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1875~1965). 신앙으로 아프리카에서 의료선교사로 일하셨고 노벨상도 타셨죠. 그분을
보면서 의사는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도 했고요. 당시 슈바이처는 한국
청소년들 사이에 위인이었죠. 의대생 때 그분을 기리는 생명경외클럽(Veneratio Vitae
Club)이라는 동아리 활동을 하였습니다.
어릴 때 일은 굉장히 깊은 영향을 끼치는데, 대개 기억이 없어요. 당시는 하찮은 걸로 생
각하지만 사실 그때 받은 영향이 커요. 사람들이 그걸 잘 어프리시트(appreciate)를 못해.
나도 지금 와서 돌이켜 보니까 어릴 때 유년주일학교에 다니고, 교회 중고등부 학생회장하
고 주일학교 선생도 하고 그랬거든요. 애들 앉혀놓고 성경 얘기나 동화도 해주고. 성경 이
야기야말로 빅 히스토리 아니겠어요? 이게 내 커리어에 엄청나게 도움이 됐어요. 내가 대
중 앞에 나가서 무슨 말을 할 때 별로 두려움이 없어요. 그게 주일학교 때부터 무대에 서고,
교회 모임에서 발언하던 그런 경험이 있으니까.
세브란스 선택 계기와 학창시절
지금까지의 말씀을 들어보면 세브란스를 선택하신 계기에 아무래도 기독교의 영향이 분명히
있을 것 같은데요.
아버지가 ‘기독교 대학 가라, 그러셨죠. 근데 이건 당시 대학입시 제도와 관련있어요. 이
전에는 대학별로 입학시험을 치렀는데, 5.16혁명으로 갑자기 대입 자격 국가고시라는게
전국적으로 실시됐어요. 굉장히 놀라고 당황했죠. 제1회 국가시험, 1962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우리가 그 첫 대상이었고요. 그런데 갑자기 체능을 시험성적에 반영하는 거예요. 필
기고사 300점 만점에 체능 50점 만점, 합계 350점 만점으로요. 그래서 체능이 결정적으로
중요해졌지요.
일단 국가고사 필기 시험 성적이 발표된 후에 그 점수로 대학에 입학지원을 하는데, 지원
후에 다시 각 대학에서 대학 책임하에 추가로 체력시험을 봤어요. 면접시험도 있었는데 점
수에 반영된 것 같지는 않았고.
체력 시험점수는 전국적으로 같은 기준을 따랐는데, 100m 달리기, 턱걸이, 멀리뛰기, 야
구공 던지기, 또 하나 팔굽혀 펴기던가? 각기 10점 만점이었죠. 집에서 스스로 시험해 보면
점수를 알 수 있죠. 시험을 치른 후에 급하게 열심히 연습하긴 했는데, 갑자기 체력을 올리
긴 어렵잖아요? 체력시험에 자신이 있으면 필기 시험 성적이 좀 낮아도 일류대학에 지원했
고, 시험 성적이 좀 높아도 체력에 자신이 없으면 급이 낮은 대학에 지원하고 그랬죠.
근데 아버지가 ‘기독교 대학 가라, 그게 좋다’ 그래서 연세대학을 갔는데 지금 굉장히 좋
아요, 후회 안 하고. 잘됐다 싶어.
선생님이 입학하신 게 1962년도니까 신촌으로 이전한 다음에 들어오신 거죠? 그러면은 그때
새 캠퍼스잖아요. 새 캠퍼스에서 생활이 어떠셨는지요.
서울역 앞 옛 교정에 대해서는 우리는 몰라요. 선배들에게 구 교정에 대한 이야기들을 듣
긴 했어요.
우리는 처음 의예과 2년은 본교에서 했죠. 의예과는 이공대에 속해 있어 가지고 거기서
캠퍼스 생활했어요. 거기 분위기는 뭐 아름답고 참 아주 좋았습니다. 당시 고등학교 국어교
과서에 신록예찬이라는 수필이 실려 있었는데, 그 신록이 연세 숲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죠.
그런데 우리는 토요일도 오후까지 수업했어. 그러니까 모두 지겨워했죠. 뭐 쓸데없이, 국
어, 독일어, 라틴어, 유기화학, 식물학, 개구리 해부까지 별걸 다 배웠어요. 근데 그 개구리
를 우리가 직접 잡아 와야 했어요. (웃음).
그때 의예과 학생들은 본과 가서 공부하면 되지, 의예과 공부할 필요 없다는게 일반적인
분위기라서 실컷 놀자는 학생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소위 “땡땡이”를 자주 쳤지. 그때 나는
아버지께서 그 어려운 개척 교회 하시면서 어렵게 등록금 만들어서 주신 건데, 내가 왜 땡
땡이 치느냐 난 죽어라 수업 듣고 공부할 거야. (웃음). 그때 완전히 내가 이상한 놈으로 치
부돼서 따돌림받고 그랬어요. 세브란스 정신약리학의 계보를 잇다,
매년 의예과에서 본과 올라갈 때 몇 명 정도 낙제했어요. 학생들은 불만이 많았지요. 그
것 때문에 의과대학에서는 의예과를 우리가 가져와야겠다, 그래서 본교하고 긴 논쟁을 했
죠. 생각하면 의예과의 수업을 맡아야 교수님들이 자리가 있으니까 본교에서 의예과를 절
대 안 놓으려고 그랬어요. 그래서 원주 의과대학을 세울 때 아예 처음부터 통합으로 6년제
하면서 의예과를 없애버렸죠.
학창시절에 기억나는 활동들이 있으신가요?
내가 어릴 때 가지고 놀던 것 중에 교회당 풍금이 있었어요. 또 중학교 때부터 성가대를
했어요. 그래서 내가 음악에다가 합창을 좋아해. 그래 가지고 교회에서는 물론 고등학교 때
도 합창반하고, 의예과 때는 기독학생회(Students Christian Association, SCA) 합창반
하고, 학교 밖에서도 아가페합창단하고, 본과 들어와서는 이브닝콰이어(eveningchoir)를
했어요. 이브닝콰이어는 의대생하고 간호대학생이 성가대를 만들어 토요일마다 병동을 돌
면서 찬송가를 부르거든요. 이브닝콰이어. 이름도 근사하죠? 이브닝콰이어는 매년 세브란
스 음악회 때 중심적 역할을 했습니다. 지금도 해요. 한때 제가 지도교수를 했죠. 우리 클라
스메이트끼리도 중창단을 만들어 연세대 축제나 세브란스 음악회에 출연하기도 했습니다.
또 SCA 활동도 했어요. 요즘의 SCA와 달리 당시 의대 기독학생회는 전통적 신앙활동을
했고, 그리고 여름방학 때 무의촌 진료를 했어요. 동기 김성규(1968년 연세의대 졸업) 전
세브란스원장이 이브닝콰이어와 SCA 회장이었어요.
교외활동으로는 생명경외클럽. 그거는 서울대, 연대, 고려대, 이대 의대생들하고 약대생
들, 간호대학생들, 서울대 수의과 학생들이 모여 교제하고 농촌 봉사, 무의촌 봉사하는 학
생 클럽이에요. 슈바이처를 본받아서 생명을 경외한다 하는 그런. 세브란스 출신 선배 중에
김일순(1961년 연세의대 졸업) 선생님 알죠? 황의호(1962년 연세의대 졸업), 또 고윤웅
(1964년 연세의대 졸업), 조범구 선생님(1964년 연세의대 졸업) 등등 훌륭한 선생님들이
그 클럽 선배들입니다.
방학 때마다 무의촌 진료를 한 게 추억이에요. 저는 여름방학에는 의대 기독학생회
(SCA), 겨울방학에는 생명경외클럽에서 무의촌 진료를 했죠
학생활동 중에 ‘분극의 밤’이라는 게 있던데요. 어떤 건가요?
의대생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단막극 축제예요. 한 학년이 하나씩 단막극을 준비해서
의대 강당에서 공연하였습니다. 분극의 밤 시즌이 온다고 하면 누가 나서서 준비하자 그래
요. 그러면 ‘내가 참여할게’ 해서 자기들이 어떤 연극을 할지 정하고 연출, 음악, 조명 다 맡
아서 하고. 어떤 학년은 또 전문가 데려다 코치도 받고 아주 열심히 했어요. 한 학년의 연극
이 끝나고 다음 학년이 준비하는 동안 막간이 잠깐 한 10-15분 있는데, 그 시간을 지루하지
않게 한다고 학생들이 나와서 대개 음악 쇼를 했어요. 나는 막간 쇼 팀으로 참여했습니다.
분극의 밤이 다른 대학 여학생들한테 인기 좋았어요. 그때 우리는 여자친구를 초대하는
거야. 자랑삼아 학교도 구경시키고 데이트하고 그랬지.
선생님께서 의대에 재학하시던 시기는 한창 학생운동이 활발하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의대에
서도 학생운동이 활발했는지, 선생님께서도 참여하셨는지 궁금합니다.세브란스 정신약리학의 계보를 잇다,
1964년 6월 한일협상 반대운동 시위가 크게 일어났어요. 연세대 전 학생들과 나를 포함
해서 의대생들도 다 같이 가두시위를 나갔죠. 아현동에서 경찰에 쫓겨서 돌아왔어요. 그러
고는 2~3일 정도로 기억하는데 의대생들이 병리학 실험실에서 단식 농성을 했어요. 외래
앞마당에서 무슨 화형식을 하고 종료했던 게 기억납니다. 당시 이 사태로 연세대는 고려대
와 같이 정부 당국으로 무기한 휴교 명령을 받았어요.
정신과 지원 이유
의대 6년 마치시고 인턴 레지던트 생활을 하셨을 텐데, 졸업하시던 1968년 즈음이 워낙에 의
사 시험 치고 외국으로 많이 나가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시기에 두뇌 유출이라는 사회
적 문제가 발생했을 때인데, 그런 문제들과 함께 당시 수련의들에 대한 대우도 그렇게 좋지 않
았었다고 들어서 선생님께서 인턴・레지던트 하시던 시기에 대한 얘기를 여쭙고 싶습니다. 먼
저 졸업하시고 나서 정신과를 택하셨는데, 정신과를 택하게 되신 이유가 무엇인지가 궁금하고
요. 그리고 그때 정신과에서는 어떤 식으로 수련을 받으셨는지요?
내가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장차 목사가 되는 게 어떠냐고 했던 그게 일종의 죄의식으로
남아 있었죠. 좋은 의사가 되겠다고 마음먹었어요. 그래서 착실하게 공부했죠. 그런 마음이
있어서 본과 와서 강의를 듣는데, 정신과 수업 때 김채원 선생님께서 프로이드(Sigmund
Freud, 1856~1939)와 정신분석을 강의하셨는데 너무 재밌는 거야. 직감적으로 정신과
의사가 목사 비슷한 직업이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수업 끝나자마자 교수실로 올라가서 ‘선
생님 저 앞으로 정신과 하겠습니다’ 그랬더니, 김채원 선생님 아주 무서운 분이에요, 낙제
를 막 시키는 분입니다. 이분이 ‘인턴하고 그래도 정신과가 하고 싶으면 그때 다시 와’ 그러
시더라고. 내가 좀 섭섭했지. 근데 당시 치프 레지던트(chief resident)로 신용건 선생
(1965년 연세의대 졸업)이라는 선배가 있었는데, ‘너 정신과 할 생각이 있냐’ 하면서, 수시
로 나오라 해서 술 사주고 그랬어요. 아마도 김채원 선생님께서 시키신 것 같은데, 나한테
잘해주더라고요. 그래서 일찌감치 정신과 하는 걸로 정해졌지요.
근데 4학년 되니까 자꾸 다른 생각이 들더라고요. 외과는 취미가 없고, 내과 할까 하다
보니까 너무 공부 잘하는 애들이 그리 간다고 그러고. 나는 애들을 좋아했으니까 소아과 할
까 하다가, 소아과도 또 뭐 경쟁이 있었어요. 그런데 정신과는 아무도 안 하려고 그러지. 그
당시 정신과는요, 그거 한다 하면 너 미쳤냐 왜 그런 걸 왜 하냐 그랬어요. 우리 아버지도
어머니도 왜 하필 그 많은 과 중에 하필 왜 정신과 한다고 그러냐, 외과해서 돈 벌어야지.
돈 벌어서 당신 개척교회 짓는데 연보(捐補)해라 이거였죠.
당시 정신과 의사라하면 대개 그 이미지가 술 퍼마시고 인생이란 뭐냐 뭐 그런 거 토론하
는 괴짜였어요. 우리 선배들 중에도 하도 술 마셔서 김채원 선생님이 쫓아낸 분도 있어요.
당시에 정신과 규모가 크지 않았던 거네요. 저의 짐작이기는 합니다만, 정신과에서 인턴・레지
던트 하셨을 때는 환자도 다른 과에 비해서는 많지는 않았을 것 같기는 한데요.
아뇨. 그 당시에는 서울 시내 정신과 개업하는 사람 몇 명, 그리고 대학병원에 정신과 있
는 데는 서울대 연대 고대 정도고, 이화여대도 있었는데 입원실은 없었어요. 그 4개밖에 없
었어. 당시 가난한 사람들은 대개 청량리 뇌병원에 가고, 저 돈 좀 있고 하면 대학병원에 오
니까 항상 환자는 넘쳐났어요. 그래서 모든 대학의 정신과 입원실 스페이스(space)는 넓었
어요. 세브란스가 처음 신촌에 병원 세울 때, 미국 미 8군에서 지어줬다는 그 병동 6층의
전면 반쪽을 다 정신과가 썼거든요. ‘62병동’이라 해요. 병원의 전체 병상이 약 400베드
(bed) 조금 넘었는데 그게 33베드였어요. 서울 시내 유명한 집안 사람들 중에 이상한 사람
들 다 여기 입원해 있었어요. 이름 대면 알 만한 분들.
인턴・레지던트 시절
세브란스가 1914년에 인턴 제도를 가장 먼저 도입했다고 그러더라구요.
역사는 잘 모르겠어요. 우리 학교 공부할 때만 해도 산부인과, 외과, 마취과 이런 데는 외
국인 선교사가 있었고, 그런 분들은 미국에 정통하니까 아마 인턴 제도가 있다고 한다면 세
브란스에서 가장 먼저 했을 가능성이 많아요. 제가 오기 전에도 하고 있었죠.세브란스 정신약리학의 계보를 잇다,
졸업하고 바로 인턴과정에 들어가셨습니다. 당시 많은 분들이 미국에 갔던 것으로 아는데요.
네 그때는 의대 졸업하자마자 모두들 미국 가는 붐이 일었습니다. 미국에 의사가 모자란
다고 해서 소위 ECFMG(Education Commission for Foreign Medical Graduates)라
는 자격시험을 쳤는데, 대부분의 의대생은 다 합격했어요. 그때 우리 학년도 70명 졸업했
는데 50명이 미국 갔어요. 다른 의대들도 마찬가지였어. 그때 사회에서는 ‘아니 실컷 공부
해서 왜 미국 가서 일하냐, 우리가 키웠는데’ 그게 두뇌유출이다 그래서 신문에 많이 나고
해서 우리가 그러면 안 되지 하는 생각도 했어요. 우리 어머니도 전쟁 날지 모르니 너라도
미국가라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안가기로 마음 먹었죠. ‘전쟁나면 군대가지 뭐’ 하고 생각
했습니다. 지금은 잘했다고 생각해요.
미국으로 많이 가셨으니, 역으로 인턴이나 레지던트를 할 수 있는 인원 자체가, 모수 자체가 줄
어드는 것은 아니었나요?
그때 세브란스도 조그마했기 때문에 인턴이나 레지던트 수급이 크게 모자라지 않았어요.
그리고 연세대만 하더라도 본교 한 20명 남았고, 미국 가기 전에 인턴 하고 간 사람도 있으
니까. 그래서 자리가 꽉 찼어요. 그중에 과에 따라 타교 출신들이 한두 명 있긴 했지만 거의
다 세브란스로 다 채웠어요.
당시에 아무래도 수련직 대우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인턴 레지던트 하시면서 좀 힘드신 점들도
있었을 거 같은데요.
그때 우리는요, 월급 적은 거는 너무나 당연한 거였어요. 기대를 안 했어요. 월급 적다는
거 알고 들어갔고, 각오하고 들어갔고. 그래서 월급 적은 거 가지고 그리 큰 불만을 가지지
는 않았어요. 그렇지만 가끔씩은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고 그래가지고 데모는 했죠. 인턴
때 데모를 했는데, 그건 맨날 하는 거야. 매년 이때쯤이다 싶으면 이제 월급이 너무 적다,
음식이 형편없다 그래가지고 12시 야간 야식 먹을 때 내려가서 식판을 뒤엎어요. 그렇게
퍼포먼스 하고 일제히 인턴숙소를 나와 어디 여관을 하나 정해서 거기서 모여 있으면 병원
직원이 와서 ‘아이, 선생님들 왜 그러세요, 난리 났어요.’ 그러면 ‘아 시끄러!’ 하고 쫓아내
고. 그리고 드디어 보수를 얼마 올려줄게 하고 연락이 오면 슬그머니 들어오고. 우리 때도
한 사흘 나가 있었다가 들어왔거든요.
레지던트 할 때는 뭐 자기 과에 충성하느라고, 그리고 무엇보다 교수님한테 잘 보여야 해
서 별소리 안 했습니다. 근데 그 논문2)을 보면 1971년도에 큰 사건이 있던 것 같은데, 가
만히 보니까 주로 서울대 중심으로 썼지, 세브란스에 대해 저는 별 기억이 없어요. 논문을
읽어보니까 ‘그때 그런 일이 있었나’ 하는 정도의 기억이죠.
그럼 대학마다 인턴・레지던트들의 대우나 파업같은 상황들이 전부 달랐던 건가요?
좀 달랐고, 우리는 월급이 좀 나온 셈이었다고 봅니다. 그 당시에 우리는 인턴 때 한 6천
원 정도는 받았거든요. 근데 내 친구 중에 서울대 친구가 하나 있는데 걔들한테 나중에 들
은 얘기인데 자기들은 월급이 별로였답니다. 그 시대에 서울대학교 교수들 월급이 일정하
지 않아서 월급이 적은 사람은 이중개업을 했어요. 그런데 세브란스는 이중개업 못하게 했
거든요. 서울대학은 국립이라 사립과는 달랐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그렇게 난
리 친 것 같아요. 우리는 세브란스라는 자부심도 있고.
수련의 시절 기억나는 다른 에피소드가 있으신가요?
사실 내 커리어 중에 가장 중요한 분이, 이동식 선생님이라는 분이 있어요. 김채원 선생
님과 더불어 저의 스승이십니다. 그분을 꼭 언급해 주면 좋겠어요. 우리 레지던트때 세브란
스에 오셔서 사이코테라피, 즉 정신치료를 트레이닝 시켜준 분이에요. 불교를 신봉하는 무
신론자이신데, 맨날 오면 뭐 정신분석하고 불교의 수도하는 거 이걸 비교하면서. 정신치료
를 가르쳤거든요. 이동식 선생님이 그 당시에 미국에서 돌아와서 한국의 유명한 스님들, 경
봉스님(鏡峰. 1892~1982)이라든가 유명한 스님들하고 대화가 된다고 우리한테 말씀하고
그랬지. 저는 당시 정신분석치료와 기독교와의 관련에 대해 생각을 많이 했어요.
2) 인터뷰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사전에 다음의 논문을 공유하였다. 정준호, 「1971년 수련의 파업:
1960~1970년대 의료 인력에 대한 국가 통제 강화와 의사 사회의 반발」,
김채원 선생님은 정신약물학과 생물정신의학을 전공하시기 때문에 아마도 균형을 맞추
기 위해 정신치료하시는 이동식 선생님을 우리 학교 외래교수로 초빙하셨던 것 같아요. 그
선생님이 나한테 아주 엄청나게 영향을 미쳤죠. 내가 화병 연구한 것도 그 양반 때문이야.
왜냐하면 이 선생님은 맨날 한국 것이 세계적이라고 말씀하셨거든요. 그럼 나는 정신과 의
사로서 한국적인 게 뭐가 있을지에 대해 질문을 가졌어요.
그래서 화병을 생각했습니다. 크레펠린(Emil Kraepelin, l856~l926) 식으로 열심히 한
거예요. 화병의 개념, 역학, 원인, 증상, 치료, 예후까지 차례차례로 해서 완성했죠. 개인적으
로 굉장히 자부심을 가지는데, 일반 사람들은 엄청 관심을 가져주었지만, 이동식 선생님은
막 나보고 야단치는 거예요. 화병은 그냥 흔히 하는 소린데 그게 무슨 질병이냐고, 니가 서양
에 사로잡혔다고. 미국 사람들이 병명 만들고 진단 기준 만들고 뭐 이렇게 체계화하는 걸 좋
아하거든요. 그래서 ‘선생님 가르침 때문에 했는데요’ 했더니 ‘시끄러워!’ 라고 하셨습니다.
결국 정신약리학을 전공하면서 이동식 선생님 문하를 떠났지. 그렇지만 내가 명절 때는 꼭
찾아뵙고 그랬지. 명절 때 이 선생님은 문하생들을 불러 파티를 하는데, 그 당시 모이기만 하
면 노래를 불렀어요, 나보고는 꼭 찬송가를 부르라고 했어요. 재미있는 분 아니겠어요?
무의촌 파견
무의촌에서도 진료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레지던트 4년차가 되기 직전에 정부에서 명령이 내려왔어요. 레지던트 4년차들한테 무
의촌 근무 6개월 하지 않으면 전문의 자격시험 칠 자격을 안 주겠다 그랬어요. 우리 같은
사람은 그때 군사 정부라서 반항할 생각을 전혀 못했어. 어쩔 수 없이 가야지 뭐, 그거 한 6
개월 견디면 되겠지 뭐, 이렇게 생각해서 부랴부랴 갔지. 나라에서 연세대 레지던트는 전라
북도로 가라, 또 어느 대학 레지던트는 어디로 가라 등등 지정이 내려왔어요.
그래서 우리가 전라북도 도청에 가니까 거기 보건 담당관이 각기 부임할 면 소재 진료소
를 가르쳐 주었어요. 그럼 그때부터 짐 싸들고 가는 거예요. 나는 김제군 백산면 보건지소
에 갔습니다. 보건지소는 요만한 건물 방 두 개 있는 거, 사무실이 있고, 책상이 있고 그게
보건지소예요. 직원으로 두 사람의 간호조무사가 있었습니다. 외래환자도 있었지만, 왕진
요청이 오면 가방 들고 시골길을 걸어서 갔지요. 일반의로 근무해서 무의촌에서는 정신과
환자에 대한 경험은 없었어요.
나하고 집사람하고 애기, 그때 아들 낳아가지고 9개월 됐는데, 문간방 하나를 월세로 얻어
살림을 차렸죠. 고생 엄청 했지만 그런대로 시골생활은 추억거리입니다. 당시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었는데, 사실 그때 통일벼라던가 농촌 사람들의 열기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군의관 시절
레지던트 이후의 생활로 다시 돌아와보도록 하겠습니다. 저희가 궁금했던 게 군의관 시절에 대
한 이야기인데요. 육군 제59후송병원하고 국군 광주통합병원에서 과장을 역임을 하셨습니다.
육군 제59후송병원의 신경정신과 과장을 하시게 하셨을 때가 궁금한데요, 보통 군의관을 몇
년 하나요?
우리 군의관들은 군사 훈련받는 기간을 포함해서 복무기간이 3년 3개월이죠. 저는 육군
제59후송병원에서 2년, 국군 광주통합병원에서 1년 근무했습니다. 우리 군의관은 그해 의
대 졸업생이 후임 군의관이 되어 배치되어 올 때까지 제대하지 못해요. 일반 사병보다 군의세브란스
관들은 거의 2배 오래 근무해요.
육군 제59후송병원에서 어떤 업무를 보통 맡아서 하셨는지, 그리고 어떤 정신질환 문제들에
대응을 하셨는지요?
후송병원도 병원이에요. 군인이나 민간인이나 정신장애 진료는 꼭 같습니다. 단지 정신
과 군의관으로서 군대 생활 부적응자 골라내는 게 특별한 임무였어요. 평소에도 의병제대
심사를 하지만, 일 년에 한 차례 특별한 행사가 있었어요. 일선 부대에서 하는 행동이 이상
하면 뽑아서 후송병원에 보내요. 대거 입원하는데. 그러면 선별해서 제대, 복귀, 제대, 복귀
등을 건의하였습니다. 그런데 꾀병 환자들이 있으니까 그걸 감별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그게 흥미 있는 일이었습니다.
여자 내의 수집광, 야뇨증 환자도 있고. 야뇨증 환자는 자대에서 하도 오줌 싸대니까, 기
합이 대단하거든요. 그러니까 실컷 기합을 받아도 계속 오줌 싸면 진짜거든. 그러니까 할
수 없이 제대감이라고 미리 알아서 보내는 거예요. 그럼 제대 시켜야지 원대 복귀시키면 그
쪽에서 난리 나요. 왜 보냈냐고. 그 당시 군대 생활 생각하면 재미있는 일이 많죠.
그러면 국군 광주통합병원으로 이동하시게 된 거는 규정에 따라서 이동하신 거예요?
제59후송병원은 전방이거든요. 근데 전방에서 있으면 그다음 후반기는 대개 제대할 때
까지 후방으로 보내죠. 후방에는 서울 국군수도통합병원. 부산 수도통합병원, 대구통합병
원, 광주통합병원 이렇게 몇 군데가 있는데 서울 출신 군의관들은 모두 서울 수도통합병원
에 가기를 원했죠. 그곳은 끝발이 되게 세요.. (웃음). 나는 광주로 밀렸지.
전남대 출신들은 대개 광주로 가거든요. 자기 고향이니까. 그때 하필 당시 정신과 군의관
중에 광주 출신이 없었던 거예요. 그래서 내가 갔는데 환대를 받았죠. ‘웬일이냐 니가 여기
왜 왔냐’ 이거지. 왜 지방 대학생이 서울 가서 공부하다가 고향에 내려가면 동네 사람들이
‘야 너 서울 가서 공부 잘하냐 우리 집 와서 밥 한번 먹어라’ 뭐 이런 분위기인데, 타지방 사
람이 광주에 왔다고 전남의대 출신 정신과 선생님들이 ‘얼마나 힘드냐, 고생이 많다’ 그래
가지고 거의 매일 저녁 밥 사주시는 거야.
저는 이 당시에 영호남 갈등이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때 저는 그런거 못 느꼈어요. 다 자기 하기 나름이죠. 나는 뭐 경상도 말 그대로 쓰고 다
녀도 아무런 지장도 없었고, 거기 있는 정신과 선생님들이 잘 대해 주시고, 전남의대 정신
과 세미나에도 참석하고, 전남의대 정신과 레지던트들도 통합병원 세미나에도 오고. 그리
고 전라도에 구경거리가 많습니다. 창하고, 거문고 켜고 이런 거 있잖아요. 내가 한번 광주
온 김에 남도 문화 그거 구경하고 싶다 그랬더니, 동료 군의관이 그런 거 전문으로 하는 아
주 유명한 요정 같은 데 데려갔더랬어요. 너무나 좋았고 고맙지. 한 선배님 주선으로 의재
(毅齋) 허백련(許百鍊, 1891~1977) 화실에도 갔었어요, 밥도 얻어 먹고 그림도 하나
얻어오고. 세브란스 정신약리학의 계보를 잇다,
세브란스 정신과와 정신약리학
군의관 하시고 나서 다시 학교로 돌아오셨는데, 세브란스 정신과로 돌아오시고 나서 어떤 활동
을 하셨는지 말씀해주시죠.
학교로 돌아왔다고 하니까 간단해 보이지만, 나는 그때 제대하면 어떡하나 걱정도 많이
했습니다. 그래도 금방 임용이 되어서 오자마자 외래하고, 연구 계획하고, 의대 수업했죠.
당시 정신과에서 저처럼 제대로 코스 밟은 사람이 많지는 않았거든요.
우리 세대 때는 다른 대학도 대개 그랬는데, 의과대학 졸업하고 인턴하고 바로 레지던트
해서 제대로 코스를 밟아서 6년 만에 전문의 자격 따는 그런 상황이 비교적 잘 정착된 초창
기 그룹이에요. 그 이전에는 말하자면 좀 혼란스러웠습니다. 인턴 레지던트 제도가 도입이
됐다고 하지만 각 과별로 대학마다 양상이 다양했어요. 군대에서 뭘 좀 배운 다음에 나와서
개업하다가 이거 좀 모자란다 싶으니까 다시 모교 들어가서 레지던트 한 2, 3년 하다가 또
나오고. 뭐 이런 경우가 많았지요. 그걸 이해하셔야 될 거예요. 그래서 우리 같은 그룹은 자
부심이 있었죠. 정식으로 과정을 밟았다. 당시 교수님들도 교수생활 좀 하다가 개업하고 다
그랬으니까요.
사진 5. 교토에서 학술대회 참가 중 은사 김채원 교수와 함께(1982년, 우측이 김채원 교수)186 ┃ 연세의사학 제27권 제1호
세브란스 정신과의 특징, 세브란스 정신과라고 그러면 연구 등에서 다른 대학과 차별되는 특징
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일제 말기에 맥라렌 교수도 떠나고, 이어 주임교수가 된 이중철 교수님(1927년 세브란
스연합의학전문학교 졸업)도 무슨 사정으로 학교를 떠나 세브란스 정신과가 없어졌거든
요. 학생 강의는 신경내과 선생님이 했는데, 해방 이후에는 청량리 뇌병원 원장하시던 세브
란스 출신 최신해 선생님(1941년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졸업)이나 서울대 정신과 교
수였던 세브란스 출신 남명석 교수님(1938년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졸업)께서 오셔
서 강의를 하고 계셨어요. 그리고 김채원 선생님이 미국서 연수 끝나고 돌아와서 다시 정신
과를 만들었습니다. 그분이 미국에서 배운 게 그 당시에 이제 막 번성하고 있는 정신약리학
과 그에 기초한 생물정신의학이었어요.
정신약리학은 당시 막 시작되는 신학문이었습니다. 정신과 약물이 개발된 건 정신의학
사에서 혁명이라고 부를 만큼 대사건이에요. 1940년대 말부터 리튬(lithium)이 조증에 쓰
이다가 1950년대 중반에 클로르프로마진(chlorpromazine)이라는 약이 발견이 됐어
요.3) 발명이 아니고 발견. 감기 기침에 쓰는 약이 하나 개발되었는데 불란서의 한 정신병
원 원장이었던 어떤 의사가 그 약을 감기 환자한테 줬더니 기침에는 별 소용이 없었는데 환
청, 망상이 없어지는 거예요. 그래 놀래가지고 이걸 조사해가지고 클로로프로마진이라는
약이 발견되었어요. 그게 전 세계로 퍼졌죠. 1960년대에 항우울제가 나오고, 1960년대 말
에 신경안정제 리브리움, 발륨(librium valium) 등등 소위 안정제가 나와서, 이게 급속도
로 세상에 퍼지지. 그러니까 제약회사가 돈을 엄청 벌었어요, 그래서 막 신약을 개발하는
거예요. 신약을 개발하니까, 실험을 해 봐야 되잖아요? 그러니까 환자가 필요하지 않습니
까? 그러니까 병원하고 계약을 맺어서 임상 실험을 하는 거예요. 예를 들어 대학병원에서
2상, 3상 실험을 한 다음에 정부허가를 얻어 판매를 하잖아요. 근데 이런 약물들이 당시 막
경제발전을 하고 있던 한국에 이제 밀려오기 시작한 거예요. 김채원 선생님이 과를 개설했
을 때, 미국서 당시 막 성장하던 정신약리학과 생물정신의학을 공부하고 왔기 때문에 한국
에서 그 방면에 선구자가 되셨습니다.
당시 다른 대학병원 정신과에서도 약은 썼지만, 이걸 전공으로, 미래 먹거리로 보는 그런
3) 클로르프로마진은 1952년 프랑스에서 정신의학 관련 질환자에게 사용되기 시작되었다. 관련 내용은
에드워드 쇼터, 최보문 역, 정신의학의 역사(바다출판사, 2020), 408-419쪽을 참조.세브란스 정신약리학의 계보를 잇다, 민성길 ┃ 187
식의 발상이 없었죠. 그 당시에 정신과의 분위기는요, 정신분석이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예
를 들면 우리나라 사람들한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Oedipus complex)가 있느냐, 이런
거 가지고 논쟁하고. 또 한국에는 히스테리가 있냐, 없냐 이런 거 가지고 논쟁하고. 또 ‘신
화와 전설을 분석한다’ 이게 유행이었어. (웃음). 1960년대 당시 한국 정신의학에서의 이
론과 치료에서의 대세는 정신분석에 기초한 정신치료, 즉 말로 하는 치료였습니다. 저는 이
게 좋아 정신과를 택했죠. 당시까지는 정신은 정신으로 치료한다 라는 거였거든요.
그런데 이제 정신병 치료한다는 약이 소개되기 시작한 거예요. 우리 김채원 선생님께서
미국에서 귀국하셔서 처음 학회에서 한 강연이 조증에 쓰는 리튬이라는 약물을 소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가지고 그분이 학회 안에서는 일약 정신약리학으로 유명해졌어요. 그
러니까 세브란스가 이제 약물치료 연구로 유명해진 거예요.
저도 의대생 때 정신분석에 대한 강의를 듣고 정신과 공부를 결심했거든요. 그런데 그쪽
으로 계속 관심 있는데 김채원 선생님이 신약을 실험하라고 주니까 ‘예’ 하고 알아서 임상
실험하는 방법을 혼자 책으로 배워가지고 그냥 그거 하고, 보고서 갖다 드리면 선생님이 그
걸 보건사회부에 내고, 이런 걸 했어요. 나도 모르게 그냥 약물학의 대가가 된 거야. 임상실
험하고 보고서도 쓴 다음에 논문도 썼으니까. 그래서 아 이걸 내가 일단 해야겠다 해서 열
심히 했습니다. 당시 내 머리는 “마음에 대한 약“(drugs for mind)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
다. 그랬더니 내가 중견이 됐을 때 좋은 세상 만났죠. 많은 제약회사가 다 나를 찾아오는 거
야. 이거 임상 좀 해줄 수 있느냐 이거지. 3상 시험.
동시에 부담감도 있지 않으셨나요?
있었죠. 그래서 제대로 하려고 노력했지. 내가 지금도 스스로 고맙게 생각하는 게, 내가
허투루 한 건 아니었거든요. 그 이유 중에 하나가 임상시험 방법을 제대로 배울 기회가 있
었거든. 그건 1980년에 덴마크 코펜하겐 의대 정신과에 연수갔을 때였어요.
당시 내가 외국에 공부하러 가고 싶어가지고 안달을 했어요. 김채원 선생님한테 내가 학
교에 들어온 지가 지금 4년이 넘었는데 왜 나 외국 공부 안 시켜주냐고 막 했더니, ‘가만있
어, 정신과 일이나 해’ 그러시더라고.
그러고 마침 짧은 기간 해외연구를 나갈 기회가 생겨 선생님께 허락을 받아 냈죠. 3개월
간 덴마크 문부성 장학생으로 코펜하겐대학 정신과로 갔습니다. 거기 주임교수는, 나중에 188 ┃ 연세의사학 제27권 제1호
깨달았는데, 라파엘슨(O. J. Rafaelsen) 교수라고 당시 세계적으로 유명한 정신약리학 학
자였습니다. 2016년 제가 국제신경정신약리학회에서 선구자 상을 받았는데, 라파엘슨 교
수는 그 창립멤버였어요. 그런데 그 정신과는 룬드벡(Lundbeck)이라는 덴마크의 한 제약
회사와 특별한 관계를 가져 신약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었거든요. 그런 데다가 부설로 정신
화학연구소(psychochemistry institute)를 운영하고 있었어요. 정신화학이라니, 마음의
비밀을 정신분석이 아니라 화학으로 연구한다? 곧 이거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유시간에 연구소 도서관에 가서 책을 살펴보는데, 클리니컬 리서치라는 책4)이 있더라
고요. 그래서 빼서 읽어보니까 어떻게 연구대상 환자를 모으고, 어떻게 실험군과 비교군
(통제군)을 나누고, 또 설문지를 어떻게 만들고, 통계 방법은 뭐고 이걸 설명한 책이더라고
요. 그래서 이걸 내가 서울로 갖고 왔어요. 한국에 와서 다시 잘 읽어보고 정리해서, 임상연
구에 써 먹었습니다.
여하튼 코펜하겐 대학에 있을 동안 연구원들에게 임상연구에 참여시켜 달라고 졸랐죠,
그래서 입문을 허락 받았습니다. 신약에 대한 기초 실험인데, 자원하는 정상인들에게 약물
을 투여하고 한밤중에 시간 맞추어 입에서 나오는 침을 모아 무게를 재고, 약물의 혈중 농
도를 측정하기 위한 피를 뽑는 일을 했습니다. 나중 제3저자로 논문5)이 나왔어요. 저의 첫
국제논문이었죠. 이때 실험했던 약물들은 지금 세계적으로 잘 팔리고 있죠. 정말 좋은 경험
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임상 정신약리학 연구를 열심히 하다 보니 세브란스가 정신약리학 그걸로 아주
유명해지고 김채원 선생님이 은퇴하신 다음에 내가 한동안 한국의 정신과 약물 치료의 대
가라는 영예를 누렸죠. 임상정신약리학이라는 책을 개정3판까지 내었어요.
정신약리학을 하시면서 임상의 중요성을 더욱 중요하게 여기셨을 것 같습니다.
나의 정체성이 뭐냐고 물어본다면, 지내온 것도 그렇고 지금도 그런데, “나는 클리니션
(clinician)이다”라는 것입니다. 나는 그냥 임상의사예요. 무슨 학자나 사상가가 아니라 좋
4) W. P. Small, Urban Krause, An Introduction to Clinical Research (Edinburgh: Churchill
Livingstone, 1972).
5) Clemmesen L, Jensen E, Min SK, Bolwig TG, Rafaelsen OJ, “Salivation after single-doses
of the new antidepressants femoxetine, mianserin and citalopram. A cross-over study,”
Pharmacopsychiatry 17, 1984, pp. 126-132.세브란스 정신약리학의 계보를 잇다, 민성길 ┃ 189
은 크리스천 클리니션. 그리고 리서치는 클리니컬 리서치(clinical research). 그리고 그
거를 후학들한테 교육한다. 이걸 나의 정체성으로 삼고 있어요. 사실은 뭐 나는 환자만 봤
으니까. 그리고 연구도 모두 환자를 통한 연구지, 대학원에서는 물론 기초 실험을 했지만,
주로 환자를 통해서 데이터 모아서 그걸 논문으로 쓰고 그랬죠. 그래서 그게 난 참 좋았다
고 봐요. 그리고 그런 클리니컬 리서치가 사실 베이직 리서치(basic research)만큼 중요
하다 하는 것을 잘 깨닫고 있습니다,
사진 6. 2016년 국제신경정신약리학회(CINP) 선구자상 수상
정신약물학회도 창설되었다고 들었는데, 어떤 과정으로 설립되었는지, 세브란스 출신들의 활
동은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대한정신약물학회는 1985년 2월 28일에 창립했어요. 당시 정신약물학회에 조금 앞서
서 서울대 의대 중심으로 고려대 의대와 카톨릭 의대 등이 생물정신의학회를 창립했는데,
그때 우리 쪽에 같이 하자고 협조를 구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우리는 김채원 선생님을 모시
고 대한정신약물학회를 만들었어요. 김채원 선생님이 초대 회장을 하셨고, 저는 총무이사190 ┃ 연세의사학 제27권 제1호
로 창설 업무를 총괄했죠. 자연스레 창립 멤버 대부분이 연세대 의대하고 당시 우리와 상호
교류하던 경북대 의대 출신의 정신과 의사들이 주축을 이뤘어요.
저는 첫 총무이사로 이후 12년 동안 총무이사를 연임하면서 학회의 살림을 도맡았어요.
창립하고 몇 년 지나면서 학술대회는 물론 학술지도 만들고 학회 규모가 빠르게 커졌습니
다. 지금 정신과 분과학회로서는 가장 크고 활발해요.
소아정신과, 의학행동과학연구소, 통일연구원
정신과 주임 교수로 계실 때 소아정신과를 창설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네, 소아정신과 만드는 거는 정말 잘한 거죠. 그 이전에는 소아정신과 환자들은 나를 포
함한 일반 정신과 교수님들이 다 보고 있었어요. 하나의 독립된 과로서의 소아정신과는 서
울대학에만 있었어요. 소아정신과라고 하려면 소아정신과 펠로우를 트레이닝하는게 중요
한 조건이야. 그래서 소아정신과를 정식으로 만들려면, 소아정신과 트레이닝하려면 지도
교수가 있어야 되요. 그때 마침 미 8군 병원에 와 있는 내 동기 전여숙(1968년 연세의대 졸
업)이라는 분이 있었어요. 미국 소아정신과 전문의, 대령이에요 아직도 미국 월터 리드
(Walter Reed) 병원에서 일하고 있어요. 내가 그 분 보고 와서 트레이닝을 도와 달라 했
죠. 미8군 군인이 왜 세브란스 와서 일을 합니까? 근데 그때 한국은 한다 하면 또 하는 거
야. 그래가지고 이제 시작됐죠. 그게 1994년 3월부터였죠.
제일 첫 졸업생 정유숙 선생님(1988년 연세의대 졸업)을 삼성병원에, 그리고 육기환 선
생님(1989년 연세의대 졸업)을 차병원에 교수로 보냈어요. 당시 삼성병원 소아정신과장이
서울대 출신인데 미국에서 소아정신과 전문의 였어요. 이분이 세브란스에서 소아정신과
트레이닝을 한다니까 ‘삼성병원에 정신과를 지금 만드는데 스텝할 분 보내달라’ 그러더라
고. 그래서 삼성병원 소아정신과 선생님은 세브란스 출신이에요.
세브란스에서 소아정신과라는 행정부서가 시작된 건 어린이병원 소아정신과인데, 이건
2006년 5월에 신의진 교수(1989년 연세의대 졸업)를 과장으로 해서 시작됐죠.
동시에 임상심리검사실 기능을 확대하여 임상심리사를 수련하는 정규 실도 만들었어요.
연대 심리학과 오경자 교수님과 협력하였지요. 세브란스 정신약리학의 계보를 잇다, 민성길 ┃ 191
사진 7. 연세대 의과대학 수학여행에서 제자들과 함께(1989년)
정신과에서 많은 역할을 하셨는데, 2000년에 의학행동과학연구소를 설립하신 것도 그중 하나
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건 어떤 역할을 하는 연구실이었는지요?
그때 과마다 연구소 하나 하는 게 유행 같았어요. 소아과의 허약아동연구소라던가, 기생
충학교실에 열대의학연구소라던가, 이런 식으로. 내가 과장 할때 하나 만들기 원했습니다.
당시 이미 김채원 선생님이 미국에서 행동과학이라는 교과목을 우리 의대에도 도입해서
학생들한테 가르치고 있었어요. 근데 내가 미국 갔을 때 정신과 과 이름 중에 Department
of Psychiatry and Behavior Science라는 것이 많아요. 그래서 거기서 아이디어 얻어가
지고, 우리도 행동과학과까지 만들 건 없으니까 연구소를 만들어서 갖다 붙이자. 미국의 의
과대학에서는 행동과학이라는 걸 주로 정신과가 해요. 이것은 정상행동(normal behavior)
연구예요. 정신과는 비정상행동(abnormal behavior)를 다루잖아요? 그러니까 당시 미국
에서 정상 인간행동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분위기가 의학, 심리학, 사회과학에서 붐으로 일
고 있었어요. 지금도 사회과학이나 경제학에서도 다 행동과학을 연구합니다. 예를 들면 경제
학에서 어떻게 한 사람이 비싼데도 불구하고 그 물건을 사는가 하는 행동을 연구하는 거예
요. 행동경제학이라고 그러죠. 이런 게 의학에도 당연히 있겠죠. 가장 큰 주제는 의사-환자 192 ┃ 연세의사학 제27권 제1호
관계, 의료 윤리 같은 겁니다. 그리고 그걸 의과대학에서 할 만한 거는 정신과가 당연한 거예
요. 어차피 병적 행동을 연구하니까.
김채원 선생님이 행동과학 교과목을 만들어서 1학년 한 학기 2시간으로 넣었어요. 그 때
갈등이 많았습니다. 각 과에서 서로 강의 시간 많이 차지하려고 다툴 때인데 김채원 선생님
이 한 교과목을 집어넣으니까 또 다른 과가 그만큼 시간을 뺏기게 되잖아요? 그러니까 논
쟁이 났는데, 그때 무슨 얘기까지 했냐, 세균 행동도 강의해야 된다고. (웃음). 이후 다른 의
대들도 따라 했습니다.
근데 연구소 만드는 건 본교의 허락을 받아야 되거든요. 그걸 관리하는 상대(商大) 교수
가 연세대에 이미 행동과학연구소가 있다 이거야. 그래서 이름 앞에 의학을 붙였죠. 의학행
동과학연구소라고.
처음에는 나 혼자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면서 일을 만들어서 행사를 많이 열었어요.
당시 제약회사 광고를 얻어 의학행동과학이라는 종합학술지도 만들어 총 6회 발간하였
습니다. 요즘 와서는 연구소를 연구에 활용을 많이 해요. 연구 교수도 발령하고 연구비도
그쪽으로 해서 받고.
2000년에는 연세대 통일연구원 원장도 역임하셨던데, 어떻게 맡게 되셨나요?
당시 남북문제가 호전되면서 각 대학에 통일연구소들이 많이 생겼어요. 연세대학교에서
는 송자(宋梓, 1963~2019) 총장이 통일연구원을 창설했는데, 제가 이영선 교수, 문정인
교수에 이어 3대 원장(2000-2002)을 했어요. 당시 저는 전우택 교수(1985년 연세의대 졸
업)와 같이 탈북자 남한사회 적응에 대한 연구를 한창 많이 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어필했
다고 봅니다. 의대교수가 본교 보직을 맡은 게 특이하다 했어요. 당시 제 대표 저술이 통
일이 되면 우리는 함께 어울려 잘 살 수 있을까(연세대학교출판부, 2004)였어요.
제가 학생 때 정신분석과 정신치료에 관심이 많아 정신의학을 전공하였듯이, 정신약리
학을 전공하면서도 사회문화 현상에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화병 연구는 물론 정신대 할머
니들의 PTSD연구도 그중의 하나지요.
당시 젊은 일본 제3세대 제일교포 정신과의사, 이창호 선생이라고, 어느 날 문득 날 찾아
와 “한국” 정신의학을 배우겠다고 해요, 그래서 학교에 펠로우 자리를 마련해주고 한 일 년
반을 나와 같이 있었습니다, 그 친구가 재일교포로서의 정체성에 심적 고통이 많았던 것 같세브란스 정신약리학의 계보를 잇다, 민성길 ┃ 193
아요. 정신대 할머니들을 연구하자 그랬어요, 그래서 우리 정신과 내에 팀을 만들어 전국의
정신대 할머니들을 찾아다니며 면담했습니다. 그 결과는 한국 정신과 학술지에 발표되었
는데, 나중에 이스라엘 정신의학지에 영문으로 전재되어 세계적으로 알려졌지요.6)
기독교에 많이 영향을 많이 받으셔서 정신의학과 목회자와의 대화 프로그램도 진행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예 했었어요. 그래서 한 6년 내내 했는데, 1년에 한 차례씩 목사님들, 사모님들, 신학생들
을 대상으로 했습니다. 호응이 좋았는데, 지금은 안해서 아쉽죠. 연세대학교가 기독대학인
데 말입니다.
맥라렌 연구
말씀이 육신이 되어: 맥라렌 교수의 생애와 사상(연세대학교 대학출판문화원, 2013)이라는
책을 내셨습니다. 세브란스 정신과 초창기를 일구어 놓으신 교수님이시라 관심이 많으실 것 같
기는 하지만, 기독교 정신하고도 연계시켜서 더 관심이 많으신 것 같은데요. 어떻게 맥라렌 교
수에 대해서 정리하실 생각을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일제시대 때 우리 세브란스에 정신과가 있었다는 것은 잘 몰랐습니다. 근데 유계준 선생
님(1961년 연세의대 졸업)은 들은 얘기가 있으니까 ‘옛날에 선교사가 와 있었다고 그러더
라.’ 그래서 ‘그래요?’ 그리고 우리는 무심하게 지냈죠.
그런데 연세대학교 100주년 기념할 때, 의과대학이 100주년의 핵심이잖아요. 세브란스
병원에서 연세대학이 시작되었으니까. 그래서 의대 학장 명의로 각 과별로 교실사를 써서
제출하라고 그랬어요. 김채원 선생님이 나보고 네가 써라 이거예요. 내가 쓰려니까 아는 게
뭐 있어야죠.
6) 이창호, 심은지, 민성길, 김주영,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들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관한 연구」,
대한신경정신의학회지 43(6), 20 0 4; Min SK, Lee CH, Kim JY, Shim EJ “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in Former Comfort Women,” Israel Journal of Psychiatry and Related
Science 43, 2011, pp. 161-169.194 ┃ 연세의사학 제27권 제1호
기생충학교실 소진탁 선생님(1941년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졸업)이라고 김채원
선생님하고 친해요. 당시 김채원 선생님하고 친한 몇 분 교수님들이 있어 늘 저희들에게
‘잘해, 열심히 해’ 그러셨지요 그때는 그렇게 교수들과 제자들 간에 개인적인 관계가 많았
습니다. 옛날에는 의과대학이 그냥 한 가족이야. 웬만한 레지던트는 다른 과 선생님들도 다
알아요. 소진탁 선생님이 역사 얘기를 듣고 ‘옛날 맥라렌 선생님의 자료를 내가 좀 갖고 있
으니까 너 줄게 이걸로 해봐’ 하고 자료를 한 뭉치를 줬어요.
그래서 읽어보니까 세상에 기가 막힌 거야. 나로서는 놀랠 노자죠. 그래서 여기저기서 자
료를 모았죠. 그래서 일단 학교에 보고서를 내었고, 그게 의학백년(연세대학교 출판부,
1986)에 실렸습니다.
은퇴후에 본격적으로 맥라렌교수에 대해 자료를 모으고 연구했습니다. 새삼 그분의 신
앙과 인품과 일제 강점기 조선 땅에서의 헌신을 알게 되어 얼마나 감명을 받았는지 몰라요.
저의 평소 정신과 의사로서의 정체성을 새로이 했습니다. 일단 그분의 전기와 학문에 대해
논문을 모아서 책을 썼습니다. ‘조선땅에 맨 처음 온 (서양) 정신과전문의’라는 내용이에
요.7) 그리고 강조한 것은 일제강점기 때 맥라렌이 제자를 키워 자신의 후임 교수로 하였다
는 거, 그 한국의 첫 정신과 의사가 이중철 선생이다. 그걸 그냥 막 떠들었습니다. 모두 인
정을 해주는데 서울대학에서 조금 다른 소리를 해요. 한때 연세의대와 서울의대 사이의 뿌
리논쟁 아시죠? 모든게 서울대학이 최초라고 하는데,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신경정신과에
한국인 교수가 있느냐 물으면 없어요. 경성제국대학에서는 한국인을 교수로 키우지 않았
으니까. 가장 이름난 분이 명주완 선생님인데, 그는 조수(일종의 레지던트) 끝나고 그냥 개
업해 나갔어요. 나중에 해방 후에 서울대 의과대학 학장을 했지만.
저는 맥라렌은 슈바이처보다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아프리카에 그 오봉강8)인가? 강
옆에 진료소 해가지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클리닉이 됐잖아요? 근데 지금은 거의 뭐 폐쇄된
상태예요. 그렇게 개인은 유명해졌지만, 지금 아프리카에 슈바이처가 일하던 병원, 후계
자? 그 지역에는 뭐 남은 게 없어요. 근데 세브란스는 어때요 지금? 그러니까 슈바이처보다
한국에 와 있던 선교사들이 더 위대한 거예요.
맥라렌의 생애를 연구할 때 기독 교회사 하는 분들이 도와줬어요. 애초 역사학자 이만열
7) 민성길, 「맥라렌 교수 (1): 그의 생애와 의학철학」, 신경정신의학 50, 2011; 민성길, 「맥라렌 교수
(2): 그의 영성 정신의학 이론」, 신경정신의학 51, 2012.
8) 가봉 오고웨(Ogowe) 강을 의미한다.세브란스 정신약리학의 계보를 잇다, 민성길 ┃ 195
교수께서 맥라렌에 심오한 것이 있다고 한번 연구해 보라고 자극을 주셨고, 한국 기독 교회
사 전공이신 고신대학 이상규 교수님하고, 그다음 서울 장신대에서 교회사 전공하시는 정
병준 교수님, 그분들이 많이 도와줬죠. 그리고 우리 처형이 호주에 이민 갔는데, 그 양반이
호주 장로교 문서실에 들어가 뒤져서 자료들을 카피해서도 많이 보내주고. 이래저래 자료
를 모아서 정리한 겁니다.
세브란스인에게 한 마디
저희가 항상 여쭤보는 마지막 질문인데요, 세브란스인에게 한 말씀 해주셨으면 합니다.
세브란스 창립 기독교 정신을 유지해라 그거예요. 기독정신이야말로 우리가 지켜야 할
연세의대의 전통이죠.
이 얘기 곁들어서 한 번 말씀드린다면, 고 강진경 선생님(1965년 연세의대 졸업)이 의료
원장 할 때 사실 세브란스가 굉장히 곤경에 처했어요. 그래가지고 판다는 말이 나왔다고.
LG가 사겠다고도 했어. 그랬는데 들리는 소리가 병원 이름을 LG 세브란스로 하라, 이렇게
요구한다 이거예요. 그랬더니 모두 화가 났어요. 거기다 어떻게 LG를 붙이냐 해서 이게 무
산이 됐어요. 그리고 언제인가 강진경 원장님이 경영 쇄신을 위해서 경영 진단을 받았어요.
갈렙이라는 회사에 부탁해서. 이 사람들이 와서 1년여 동안 여기저기 조사하고 해서 세브
란스가 다시 살아나기 위해서는 어떤 경영정책을 세워야 되느냐? 그리고 레코멘데이션
(recommendation)을 내놨어.
그 발표할 때 우리 교수들이 다 참석해서 그걸 들었거든요. 근데 그 갈렙이 조언하는 게,
앞으로 세브란스가 살아날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방법은 창립정신인 기독교를 프로모션
하라 이거예요. 그동안에 많은 사람들이 세브란스가 기독교 병원인지 잊었죠. 이름이 왜 세
브란스인지도 모르고, 그냥 재벌이 하는 줄 알아요. 내가 한번 택시 타고 들어오는데 운전
수가 ‘야 이 병원 되게 잘 지었네. 이거 어느 재벌에서 하는 거예요?’ 이러더라고요. 여하튼
경영진단에 따라 그럼 병원에서 기독교를 알리기 위해 어떻게 하느냐 해가지고 아이디어
를 모았는데, 복도에 찬송가 트는 거, 교목실과 원목실을 확장하고, 또 선교센터를 만들고,
그걸 홍보하고. 새 병원에 들어가자마자 큰 족자 있잖아요. 그거 뭐라고 썼는지 알아요? ‘여196 ┃ 연세의사학 제27권 제1호
호와는 나의 구원이시다.’ 성경 구절이에요. 이사야서에 나오는. 여기저기에 기독교 관련
자료를 전시하고 그랬어요. 그러면서 병원 상황이 서서히 좋아졌어요.
근데 이 얘기가요, 일제시대 때도 한 번 있었답니다. 일제시대 때도 1930년대인가 한때
병원 경영이 잘 안돼서 선교사들이 교회를 세우고 전도를 하지 왜 병원을 해야 하느냐 그런
논의가 있었대요. 그게 우리가 볼 때는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에요. 그때 결정이 병원 그만
두고 나가서 선교에나 충실하자 그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랬는데 당시 맥라렌 교수
가 그때 어떤 역량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전해지는 전설에 의하면 ‘육체의 구원도 영혼 구
원이다. 선교병원은 반드시 해야 된다’ 이런 식의 얘기를 했다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당시
세브란스도 병원은 계속하되, 기독교 선교도 강화하기로 해서 오히려 병원이 잘 됐다는 그
런 말 들었습니다. 지금도 같은 스토리가 되는 거죠. 그래서인지 지금 우리 병원이 한국 최
고로 잘 되고 있잖아요?
정신과교실의 전통을 살려 정신약리학이 발전하면 좋겠다는 말도 남기고 싶습니다. 정
신약리학은 현재 뇌과학의 핵심입니다. 정신약물이 작용하는 곳은 신경 시냅스입니다. 요
즈음 사회문제가 되는 마약도 이 시냅스에 작용하죠. 현대 과학은 시냅스와 관련하여 유전,
분자생물학, 신경신호, 마약, 등을 연구하고 있어요, 더구나 정신약물은 정신장애 치료까지
하지 않습니까? 정신약리학은 신경과학과 정신의학 그리고 행동과학의 꽃입니다. 언제인
가 정신치료와 약물치료의 공통의 장이 발견될 겁니다. 좀 과장하여 말한다면 시냅스를 통
해 우주를, 하나님의 창조섭리를 엿볼 수 있다고 봅니다. 덴마크를 보십시오. 작은 나라지
만, 신약개발로 엄청난 국부를 만들어 내지 않습니까? 우리 모교에 이 계통의 학문이 번창
하기를 원합니다. 세브란스 정신약리학의 계보를 잇다, 민성길 ┃ 197
사진 8. 2024년 5월 10일 인터뷰 당일 민성길 명예교수
오늘 장시간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네 나도 고맙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말씀 남기고 싶네요. 내 평생에 걸쳐 부모님의 기도
가 전적인 도움이 되었다고 봅니다. 당시 부모님들이 대개 그러하셨지만, 자식을 위한 기도
와 교육열이 남달랐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물론 결혼한 이후에는 아내도 열심히 나를 위해
기도하여 왔습니다. 그래서 남은 삶은 진실된 크리스천 의사로서 봉사하려 합니다. 감히 말
씀드립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
니하여 ……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린도전서 1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