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우는 평소 토론에 능하고 친구들과 깊은 생각과 친밀감을 나누는 섬세한 감성을 가진 아이였는데 모욕감과 억울함이 해소가 안되니 교실에서 마음이 많이 어두워지고 다른 아이들과 대화를 나누기도 어렵고 평소 호의적이었던 친구도 현우를 냉정하게 대하는 이상한 분위기 속에서 하루 종일 조용히 교실에 있다가 귀가하고 있다고 했다.
결국 현우의 부모님은 상황을 듣고 현우의 억울함을 달래줄 수 있는 방법을 강구했다. 놀린 아이는 인지적으로 워낙 떨어지는 아이여서 현우가 마음에 화를 낼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을 정리했으나 때린 아이는 평소에 관계도 괜찮았던 아이인데 대뜸 다가와 모든 아이들이 보는 가운데서 다짜고짜 현우를 때렸고, 현우가 교실 바닥에 쓰러져서 한참을 있었던 정황이었어서 현우의 억울함과 모욕감을 해소하기 위해 현우가 맞는 것을 본 아이들 앞에서 진지한 태도의 공개사과로 마무리 할 것을 선생님에게 제안했다.
필자로서는 아이들의 돌발적인 실수이니 때린 아이가 자신의 잘못을 진지하게 인정하고, 맞은 아이의 마음을 만져줄 수 있는 사과를 하고, 또 맞는 것을 모두가 봤으니 그 아이들 앞에서 그런 사과와 용서가 이루어진다면 때린 아이에게도, 맞은 현우에게도, 또 그 장면을 본 아이들에게도 성장으로 연결될 용기 있는 장면이 될 꺼라고 상식적인 판단이 되었다. 물론 과거에는 이런 상황은 빠른 시간 안에 공감과 용기와 인정과 성장의 가르침으로 마무리가 되고, 아이들은 아이들인지라 빠르게 일상의 관계로 돌아가게 마련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학교 측에서 “가해아동의 인권”을 보호해야 하는 학생인권조례 때문에 여러 아이들 앞에서의 공개 사과는 절대로 허용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때린 아이의 부모도 자신의 아이의 인권이 중요하기 때문에 현우부모님의 요구에 응할 수 없고, 부모님의 배석조차도 응할 수 없으며 아이들끼리만 다시 서로 사과하게 하겠다는 답을 보내왔기 때문에 현우의 부모님과 현우는 좌절감이 해결이 되지 않아 결국 “학교폭력위원회”에 호소하기로 마음을 정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필자로서는 의아했다. 5학년 아이들이 아이들 앞에서 일방적으로 때리고 맞는 일이 벌어졌는데 그 일을 바라본 아이들 앞에서 서로 진심으로 사과하고 용서하는 장면을 갖는 것이 인권의 문제일까? 용기와 자신의 잘못에 대한 인정과 진정한 사과와 용서를 배울 수 있는 교육적인 의도로 당연하게 오랜 세월 행한 방법이 아닌가? 백보 양보해서 이것이 인권의 문제라면 피해아동의 인권보다 가해아동의 인권이 더 우선시 되는 것인가? 무게감 있게 다뤄지는 장면 안에서의 진심어린 사과와 용서로 간단하게 또 마음의 상처가 굳어지기 전에 빠른 시간 내에 해결될 수 있는 상황인데, 그것이 안 되어서 서로 진술서를 작성해서 교육청으로 출두? 하는 “학교폭력위원회”까지 가야 한다니 안타까웠다.
그러나 필자의 오랜 생각, 즉 때린 아이를 위해서도 상황을 가볍게 다루지 않는 것이(최소한의 반성과 사과) 교육적으로 필요하고, 맞은 아이는 억울함이 해소되지 않았을 때 그 영향이 10여년 이상도 지속되는 경우들을 익히 봐왔기 때문에 억울함이 적절히 해소될 수 있는 절차를 밟는 것이 두 아이 모두를 위한 것임을 무거운 마음으로 조언했고 상대 아이의 부모에게도 이런 점들을 분명하게 대화하시라고 권유했다.
수 일 후에 반가운 답이 들려왔다. 상대 아이의 부모가 원래 뜻에서 양보해서 두 아이의 부모님이 배석을 함으로 현우의 안정감과 자리의 무게를 확보했고, 그 자리에서 때린 아이가 진지하게 사과를 해 와서 현우의 마음이 많이 풀어지고 진심으로 용서를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선생님의 처음 대처로 인해 생긴 불신감의 해소는 아직 현우 마음의 과제로 남아있는 듯 했고 그 대처 또한 단순치 않은 정황들의 결과일 것이니 사회적 과제로 생각되었다.
아이들의 마음은 단순하다. 억울한 상황을 당한 마음을 알아주면, 또 그 나이에 맞는 적절한 책임을 지게 함으로써 상대를 함부로 때리면 안 된다는 것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몸으로 학습하게 하면, 자신을 조심하고, 반성을 배우고, 용기를 배우고, 용서와 화해를 통해 관계가 회복되는 대인관계의 기본을 학습하게 된다. 무엇을 위한 인권인지 의문스러운 인권의 강조와 적극적이고 즉각적 중재를 통해 마땅한 교육을 해왔던 교사들의 권위와 진심을 보여주는 전통적 중재가 보이지 않는 학교 상황을 보며 뭔가 변화와 회복이 시급하다는 느낌을 받는 것은 필자만의 생각은 아닐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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